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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남도영] 유해 발굴 현장의 병사 100명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문재인 대통령이 세기의 이벤트를 벌인 판문점에서 동쪽으로 100여㎞를 가면 강원도 철원 화살머리고지가 나온다. 100명의 병사가 뙤약볕 아래 유해 발굴 작업 중인 곳이다.

우리 측 비무장지대(DMZ)에 자리한 화살머리고지는 철원평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전술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고도 200여m에 불과한 작은 언덕을 차지하기 위해 6·25 당시 4번의 큰 전투가 벌어졌다. 중국·북한군 병사 3072명과 한국·미국·프랑스군 310명이 사망했다. 지난 4월 1일부터 화살머리고지에서는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지난해 문 대통령의 평양 방문 당시 남북이 맺은 ‘9·19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에 따른 조치다. 지난달 초 관훈클럽 답사단 일원으로 화살머리고지를 찾았다.

화살머리고지는 노란색, 주황색, 하얀색 줄들로 구획이 촘촘히 나뉘어 있다. 노란색 줄이 쳐진 지역은 지뢰제거작업이 완료된 곳이고, 하얀색 줄이 쳐진 지역은 지뢰제거작업이 진행 중인 곳이다. 주황색 줄은 접근이 금지된 통제지역이다.

고지에서 지뢰 제거와 유해 발굴 작업에 투입된 장병은 모두 100명이다. 남북 합의에 따른 숫자인데, 100명은 세 부류로 나뉜다. 직업군인인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요원들은 전체 발굴 작업을 지휘한다. 6공병여단 병사들은 지뢰제거를 맡고, 5사단 병사들은 조심스럽게 땅을 파는 작업, 즉 유해 발굴을 담당한다. 하얀색 줄 구역 안에는 방탄조끼 등 모두 20㎏이 넘는 보호장구를 착용한 공병들이 지뢰탐지기로 지뢰제거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방문 당시 두 달 동안 지뢰 189개, 불발탄 2778개를 제거했다.

노란색 줄 구역은 5사단 병사들의 유해 발굴 작업 현장이다. 발굴 작업을 위한 핵심 도구는 호미와 솔이다. 조심스럽게 땅을 팔 수밖에 없는 현장의 특성 때문이다. 병사들은 호미를 들고 언덕 경사면과 등성이를 조심스럽게 파헤치고 있었다. 땅속 1~2m를 파 내려가며 유해와 유품들을 찾아내는 고단한 작업이다. 한 병사는 몸을 구덩이 속에 절반 이상 집어넣고 호미로 흙을 긁어내고 있었다. 병사의 몸은 흙과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 기온은 섭씨 25도를 웃도는 초여름 날씨였다. 날씨가 더워지자 발굴작업은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30분까지만 이뤄진다고 한다. 방문 당시까지 63구(399점)의 유해가 수습됐다. 군은 이곳에 300여구의 유해가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굴 현장에서는 혹시 모를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땅바닥에 앉는 게 금지돼 있다. 발굴 현장 한쪽에 마련된 휴식 장소에서 간이의자에 앉아 쉬는 게 원칙이다. 군 관계자는 “병사들이 고고학을 전문적으로 배운 것도 아니고, 더운 곳에서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병사들도 입대 전까지는 자신이 DMZ 내에서 호미를 들고 6·25 전사자 유해를 발굴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2018년 이후 한반도 정세는 요동쳤다. 3번의 남북 정상회담, 2번의 북·미 정상회담이 이어졌다. 30일에는 남·북·미 정상들이 처음으로 판문점에서 만나는 ‘세기의 이벤트’도 열렸다.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지도자들의 노력은 존중받아야 한다. 다만 지도자들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더운 여름날 지뢰를 찾고 호미로 땅을 파는 병사들의 노고도 기억돼야 한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지도자이지만, 역사의 내용을 채워나가는 것은 결국 국민의 땀이다. 화살머리고지에서 총을 잡고 숨진 채 66년 만에 발견된 무명 병사도 그를 찾기 위해 투입된 병사들의 선배였다. 유해 발굴 현장으로 들어가는 DMZ 통문 검문소에는 다음과 같은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선배님들의 숭고한 희생, 우리가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조국의 품으로 반드시 돌려보내겠습니다’. 화살머리고지에서 작업 중인 100명의 병사들이 무사히 임무를 마치기를 기원한다.

남도영 디지털뉴스센터장 dy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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