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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박동실]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천덕꾸러기 신세?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해 가는 느낌이다. 일본 정부는 “국제법상 있을 수 없는 판결”이라며 공세를 취하고 우리 정부는 곤혹스러워 보인다. 국제법학자들의 비판도 들린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은 전원합의체 판결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에 제기한 손해배상청구권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피해자들은 미지급된 임금이나 보상금을 청구한 것이 아니라 일본 기업의 불법행위로 피해받은 정신적 고통에 대해 위자료를 청구했다. 소송 제기 13년8개월 만에 나온 확정판결이다. 그 과정에서 2012년 대법원이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해 파기 환송한 판결을 뒤집고자 행정부가 사법부와 협의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국제사회에서 ‘개망신’ 안 되게 하라고 지시했다 한다. 외교부 장관은 “일본이 법치주의를 얘기하는데 국내에서 이기고 국제적으로 지면 정권이 날아간다”고 말했다 한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청구권협정 적용 대상에 피해자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은 포함돼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이번 판결은 현실을 무시한 잘못된 판단인가. 이른바 ‘국뽕’ 판결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 최고의 법률가들이 비상한 상황에서 혼신을 다해 내린 판결이다. 한·일 양국 어디에서도 이번 판결만큼 깊이 있고 치열하게 청구권 문제를 다룬 적이 없다.

헌법에 따라 체결·공포된 조약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 우리나라에서 조약을 해석하고 이행하는 주체는 대내적으로 행정부이며, 대외적으로는 한국 정부가 된다. 이번 사건처럼 조약이 재판상 적용 법규로 되는 경우에만 대법원이 구체적으로 조약을 해석·적용하게 된다. 따라서 청구권협정의 의미·내용과 적용 범위는 법령을 최종적으로 해석할 권한을 가진 대법원이 정한다.

대법원 판결은 ‘조약법에 관한 빈 협약’의 조약해석 원칙에 충실하게 청구권협정을 해석해 피해자들이 제기한 사건에 적용했다. 협정상 청구권은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에 관한 것, 즉 재산에 관한 것이므로 정신적 손해배상청구권이 포함될 여지는 없다고 보았다. 이어 청구권협정 체결 이후 국내에서 청구권 협정이 실행되는 모습도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청구권 협정 체결 이후 국내법 제정을 통해 지급한 금액은 ‘피해자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의 변제청구’가 청구권협정의 대상에 포함됨에 따른 후속 조치이지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에 대한 변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청구권협정을 둘러싼 갈등은 처음부터 예견됐다. 협정 교섭 과정에서 한국 측은 피해자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적용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주장했고, 불법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측은 극력 반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측은 협상을 타결하고자 각자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는 문언으로 합의를 보았다. 양측은 서로 ‘의견을 달리하기로 합의’하는 협정문을 채택한 셈이다. 한국 측으로서는 이 협정이 일본의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므로 협정문이 어떤 표현을 사용하더라도 불법행위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이 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될 여지는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일본 측도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표현을 확보함으로써 손해배상청구권 문제가 해결됐다고 주장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피해자가 입은 손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협정에서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 그 협정으로 해결됐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이러한 협정문과 그에 따른 실행을 기초로 판결했다. 이번 판결로 강제징용 피해자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 된다. 그런데 대법원의 최종 해석과 별개로 정부의 대외적 의사표시 문제가 있다. 여기에는 책임이 따른다.

먼저 정부가 대법원 판결과 다르게 대외적 의사표시를 한 적이 없다면 대법원 판결 법리에 따라 당당하게 일본 정부와 협의할 일이다. 국제법 공세를 펴는 일본 앞에서 침묵하는 정부를 보는 국민은 답답하다. 그러나 만약 정부가 은밀히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도 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는 것으로 의사표시를 했다면 대법원 판결을 이유로 대외적 입장을 변경할 수는 없다. 국제법에 위반된다. 조약은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 이 경우 정부는 먼저 국민에게 진상을 밝혀야 한다. 대외적 책임도 져야 한다. 이는 우리나라와 국제사회의 신뢰에 관한 문제다.

박동실 전북대 초빙교수·전 주모로코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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