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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칼럼] 형식이 내용을 이끌기도 한다



리얼리티 쇼처럼 시작된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만남
구체적 비핵화 성과 도출하는 계기로 만들어야
이를 위해선 문 대통령의 실용적 접근이 가장 중요
양 극단 주장에 휘둘리지 말고 냉정하게 관리하길


도널드 트럼프는 역시 리얼리티 쇼의 황제다. 그는 30일 한반도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리얼리티 쇼를 성공시켰다. 미국 대통령이기에 가능했고,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쇼였다. 전 세계의 이목을 단숨에 잡았다. 지구에서 유일한 분단 현장, 어디에도 없는 화력 밀집 지역, 핵으로 미국과 담판하는 은둔 국가의 지도자, 미·중의 안보 이익이 가장 날카롭게 부딪히는 장소…. 흥행 요소는 두루 갖췄다. 게다가 예상을 뛰어넘은 정전 66년 만의 판문점 남·북·미 정상의 만남, 사실상 3차 북·미 정상회담, 북한 땅을 처음으로 밟은 미국 대통령 기록까지.

트럼프와 김정은은 서로 상당히 남는 거래를 했다. 하노이 회담 무산 이후 교착 또는 후퇴한데다 좀처럼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고, 그래서 별로 기대가 없었던 터여서 손해도 전혀 없다.

비무장지대(DMZ) 흥행은 미국 대통령과 북한 최고지도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이뤄졌다. 트럼프 입장에서 북핵 문제는 재선에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재료다. 그에게 재선은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다른 건 하부 요소다. 북핵은 조만간 해결 기미가 없다. 하지만 충분히 통제하고 상황 관리하고 있다는 점을 미 의회나 유권자에게 보여주는 건 중요하다. 한반도보다 훨씬 더 미국 이익에 영향을 주는 이란 문제는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다. 북핵이 더 악화되면 곤란하다. 성과를 내기 위한 트럼프의 노력과 절차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다는 걸 이번 회동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북핵은 조만간 해결될 현안이 아니다. 획기적 진전이 있더라도 내년 선거 전 어느 시점에 이뤄지는 게 좋다. 지금으로선 이보다 좋은 카드를 쉽게 찾을 수 없다. 현재 북한은 미국에 의해 그런 수준에서 관리되고 있다.

김정은은 아무런 성과 없는 하노이 회담으로 북한 내부에서 최고지도자로서의 체면을 구겼다. 외교 실력도 칭송받지 못했다. 먹고사는 문제는 미국과 국제사회 제재로 나아질 기미가 별로 없다. 하노이 회담 무산 책임을 참모들의 책임으로 돌려 일부를 숙청했지만 궁지에 몰린 형국이다. 최근 강도를 높인 한·미에 대한 비난 수준을 보면 그렇다. 그런데 이번 만남은 난국 속 호재다. 미국 대통령이 먼저 코앞까지 찾아와 만나자고 했고, 거기에 “당신네는 빠져”라고 핀잔 주는 남한의 문재인 대통령까지 같이 오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북한 내부에는 트럼프와 문 대통령이 하노이 이후 제법 예의를 갖춰 문밖까지 찾아왔다고 선전하면 된다. 최고 존엄의 체면도 좀 산다. 상황 개선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이익이다.

이 회담이 성사되기까지 다 공개할 수는 없겠지만 문 대통령의 중재 노력이 상당히 있었을 것이다. 문 대통령이 성과를 낸 데 대해 평가를 해야 한다. 이런저런 시각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도달해보지 못했던 영역에 역사적인 한 걸음을 딛게 한 것이다.

북·미 사이에 좋은 희망적인 표현이 나온 것을 성과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번 이벤트를, 나아가 북핵 문제 자체를 좀 차갑게 볼 필요가 있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만남은 철저히 계산된, 재선과 체제 결속·강화라는 내부적 목적이 뚜렷한, 그래서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두 사람 자신의 이익 극대화가 만들어 낸 것이다. 거기에 시비 걸 생각은 없다. 지금 이 시대 그렇지 않은 나라가 없고, 그렇지 않은 국제·국내 정치가 없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가 다시 궤도에 들어선 건 의미가 크다.

문제는 우리 내부다.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트럼프 찬반 집회는 상투머리 자르라고 하니 곡기를 끊는 무지한 자들을 연상시킨다. 우물 안 개구리 꼴이라고 단순히 무시해버리면 좋겠지만, 이 장면이 지금 우리 정치의 하부 구조라는데 문제가 있다. 트럼프가 떠난 이후 일부 보수는 내용 없는 문재인식 보여주기 쇼, 북한에 굽신거린 흥행이라는 비난을 할 것이다. 일부 진보는 미국에 업혀 가는 한국 외교, 대북 제재 해제만이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을 할 것이다.

역시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다. 남북 관계와 북핵은 대통령이 주도하는 영역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실용적이어야만 한다. 아니 실용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현 정권이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시 결정한 정책이나 정치적 언행을 보면, 그리고 이후 진행된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문 대통령도 추상적 목표와 구호가 아니라 어느 정권이 들어서도 되돌아갈 수 없는 구체적인 한반도 현실을 만들어야 한다. 지지자들의 신념에만 기반한 정책은 실용적이지 못할뿐더러 여론의 전폭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 양 극단의 주장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모처럼 되살린 기회를 실용적으로 활용해 의미 있는 성과를 내는 게 대통령의 책임이고 의무 아닌가. 리얼리티 쇼처럼 시작됐지만 실용으로 구체화해야 한다. 형식이 내용을 이끌기도 한 역사적 사례는 적지 않다.

김명호 수석논설위원 m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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