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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홍인혜] ‘아꼬와, 아꼬와’



얼마 전 조카가 태어났다. 남동생 부부가 딸아이를 낳은 것이다. 부모님은 손녀를 얻은 기쁨을 만끽했고, 나는 고모가 된 영광을 누렸다. 동생 내외는 작년 가을, 아기가 생겼다는 소식을 전하며 나에게 태명을 부탁한 바 있었다. 소중한 첫아이의 이름은 시인이자 카피라이터인 고모가 붙여줬으면 한다고 했다. 나는 시적인 사명감과 직업적인 책무감에 오래 고민했다. 그 어떤 시를 쓸 때보다, 그 어떤 브랜드의 네이밍을 할 때보다 골몰한 끝에 제주도를 좋아하는 동생 부부를 떠올리며 ‘오름이’라는 태명을 전달했다. 제주의 오름들, 그 푸르고 든든한 품을 떠올리며 나의 첫 조카가 산처럼 푸근하고 튼튼한 아이가 되길 소망했다.

오름이는 시간 개념이 명확한 아기인지 예정일에 정확하게 태어났다. 우리 모두의 소망처럼 건강한 아기였다. 양가의 가족들은 병원으로 달려가 유리벽 너머로 오름이를 만났다. 분명 어제까지 없던 3㎏짜리 존재가 세상에 등장했고 우리의 마음도 3㎏씩 차올랐다. 그날 이후 가족의 SNS 대화방은 아기 사진과 영상으로 도배되기 시작했는데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더 보여줘!’의 마음이었다. 아기가 웃으면 웃어서 반가웠고, 울면 울어서 사랑스러웠다.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는 것이 신비했고, 발가락이 열 개인 것이 경이로웠다.

그리고 며칠 후 오름이가 산후조리원으로 이동하는 날이 찾아왔다. 면회가 제한된 조리원이라 일단 들어가고 나면 3주간은 오름이를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온 가족이 출동했다. 병원과 조리원이 지척이라 이동시간은 10분 정도였지만, 그 짧은 찰나라도 아기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퇴원 수속을 마친 한 무리의 어른들이 신생아실 바깥에서 오름이를 기다렸다. 마침내 강보에 포근히 감싸진 그 애가 우리에게 왔다. 지난 며칠간 유리벽 너머, 혹은 화면으로만 보던 바로 그 아기의 생생한 실물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은 10분. 그 시간은 마치 세계적인 스타의 팬 미팅과 같았다. 작은 아기를 둘러싼 정수리들이 눈앞에 가득했다.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아기를 보고 싶으면서도 차마 건드리기 벅찬 어른들이 아기 주변을 빙빙 돌았다. 우리 모두는 주어진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모든 찬사를 퍼부었다. “신생아 머리털이 어쩜 저렇게 많을까.” “콧대가 벌써 살아있네.” “눈이 왕방울만 해.” “입술이 통통하니 앙증맞네.” 엄마는 나에게 “아기가 울지도 않고 참 점잖네” 하고 감탄했고 나는 “그러게, 몇 번 태어나본 것 마냥” 하고 맞장구쳤다. 사돈어른도 다가오시더니 “귓불이 두둑하니 복스럽던데 보셨어요?” 하고 내가 놓친 부분을 짚어주셨다. 그렇게 오름이는 10분간 쏟아진 세상 모든 축복과 감탄을 온몸에 휘감고 조리원으로 들어갔다.

홀로 귀가하는 길, 나는 아까의 일을 곱씹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며, 그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이런 찬사를 받는 순간이 또 있을까. 오름이는 단지 거기에 있었고, 우리들은 오름이의 있음이 황홀했다. 웅변하지 않았는데도 모두의 심장을 움직였고, 고요히 잠들어 있었음에도 우리의 마음을 훔쳤다. 문득 나를 스쳐 지나가는 이 길 위의 모든 사람들이 신비했다. 세상 모든 인간들에겐 아기였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그를 경이로워하는 나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하품만 해도 주변이 자지러지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고, 당신 역시 옹알이만 해도 모두가 활짝 웃었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세상에 왔다. 나는 이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제주도가 고향인 친구가 조카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아꼬와, 아꼬와”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무슨 뜻이냐 물었더니, ‘아꼽다’는 제주 방언으로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의미라고 했다. 나는 오름이를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아꼬와, 아꼬와” 하고 중얼거렸다. 너와 함께했던 귀한 시간이 그토록 빠르게 흘러가버림이 아까웠다. 그곳에 모였던 어른들은 사랑스러운 너에게 무엇이든 더 해주고 싶은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를 정도로 안타까웠을 것이다. 나는 다시금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오름이처럼 ‘아꼬운’ 존재들이었을 것이다. 가끔 세상살이에 지쳐 아무도 나를 아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도 이 마음을 떠올려야겠다. 분명 누군가는 어린 나를 바라보며 ‘아꼬와, 아꼬와’ 하고 생각했을 테니까.

홍인혜 (시인·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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