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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서-김의구] 따릉이를 예찬함



요즘 서울 곳곳에서는 연두색 자전거 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출퇴근길 직장인뿐 아니다. 미세먼지가 걷힌 햇볕 좋은 날이면 서울시 공공임대 자전거 ‘따릉이’를 모는 시민들이 어디서나 눈에 띈다.

이들의 얼굴은 생기로 환하고 페달을 딛는 다리에는 힘이 넘친다. 자전거로 건강을 되찾은 기쁜 경험을 모두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전거의 건강 효과에 무슨 확고한 신념이 있기 때문만도 아닐 터이다. 그저 이 원초적 이동수단에 올라앉는 순간 저절로 행복감이 밀려들기 때문이다. 자전거 타는 즐거움을 누리려면 기초적인 건강과 생활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흐뭇한 미소를 부르는 것은 걸음보다 효율적인 자전거의 편익에 대한 감탄, 몸을 움직이며 느끼는 원초적 쾌감 때문이다.

앞뒤 일자인 얇은 두 바퀴로 전진하는 자전거는 신비롭다. 19세기 유럽에서 시작됐다는 이 불편한 탈거리는 경이로운 발명품이다. 지표에 수직인 균형선을 이탈하려는 힘을 직진의 관성력이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네 바퀴나 세 바퀴에서 인류는 더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우리는 자전거 발명의 단초가 된 역학을 재경험한다. 넘어질 것이라는 불안감 속에 가속을 했을 때 어느덧 똑바로 달리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감격한다. 용기를 내 앞으로 나아갈 때 오히려 쓰러지지 않는 역설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기원전 중국 고사에도 등장하는 네 발 달린 수레에 비해 자전거의 등장이 늦은 것은 그만큼 자전거의 메커니즘이 경이롭기 때문이다.

자전거에서 보는 풍경은 아파트에서 내려보는 거리나 산하와 많이 다르다. 한강변을 자전거로 달려보면 한강이 아름다운 푸른빛 속에 빌딩 그림자를 반사하는 심미적 대상만이 아님을 금방 느낄 수 있다. 물냄새에 묻어 마치 강의 옆구리를 들여다보듯 다가오는 웅장한 입체감은 압도적이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잔물결의 디테일은 강이 그저 구경거리가 아니라 내 주변에 살아 움직이는 자연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김훈은 ‘자전거 여행’이란 에세이를 출간하며 서문에서 자전거를 풍성하게 예찬했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 그는 쉰 초반이던 1999년 가을부터 2000년 여름까지 풍륜(風輪)이란 자전거에 몸을 싣고 전국을 다니며 보고 느낀 것을 기록했다.

서울시가 2015년 10월 운영하기 시작한 따릉이는 폭발적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자전거 대수가 2000대에서 2만대로, 대여소는 150곳에서 1540곳으로 늘어났다. 회원 수는 4년 만에 3만4162명에서 136만8093명으로 증가했다. 연간 이용건수는 2235만1390건이다. 2015년 11만3708건의 200배에 가깝다.

서울시는 올해 안에 따릉이를 3만대로, 대여소도 2140곳으로 늘릴 계획이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공용자전거의 운명은 밝지 않다. 프랑스 파리의 공용자전거 ‘벨리브’는 2007년 7월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인기를 누리다가 최근 들어 침체를 겪고 있다. 중국이나 홍콩, 싱가포르의 공공자전거 서비스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한다. 도난 방지나 정비 같은 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수익이 비용을 따라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릉이나 우리 지방도시의 공용자전거들은 부디 다른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 정책을 다듬고 재원을 투입해 시민 축제를 열 만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성숙시키길 기대한다. 교통혼잡 같은 우리네 도시 문제를 해결하고 환경 문제를 줄이려는 국제적 노력에 부응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는 내리막이다.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하게 비긴다. … 길은 결국 평탄하다”고 설파했던 김훈과 같은 통찰을 얻어보잔 것도 아니다. 그간 관조하기만 하던 우리 삶의 터전 곳곳, 아름다운 우리 국토 이곳저곳을 자기의 몸을 태워 얻은 에너지로 살갑게 체험하는 즐거움을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온갖 첨단 기계가 넘치는 시대에 원시적 본능에 따르는 즐거움을 놓아버리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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