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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김현길] 한국 축구 신화 이후



“언제나 가장 빠른 자가 경주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가장 강한 나라가 전투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지만, 대부분은 그렇다.” 이 문장을 쓴 데이먼 러니언은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의 원작 소설을 쓴 작가이면서 스포츠 기자였다. 야구와 복싱 등을 취재한 러니언은 강자가 이기는 예측 가능한 현실을 누구보다 자주 접했을 것이다.

스포츠에서 전복의 순간이 값진 것은 그 순간이 쉬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약한 줄 알았던 팀이나 선수가 강한 상대를 차례로 꺾는 과정은 제3자까지 매료시킬 정도로 큰 재미와 감동을 준다. ‘언더독’의 예상 밖 선전에 신화라는 수식어를 자주 붙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지난 3주 넘게 우리는 20세 이하(U-20) 남자 축구대표팀이 한 세대 전 ‘4강 신화’를 ‘준우승 신화’로 대체하는 과정을 목격했다. 정정용호가 ‘죽음의 조’에서 살아남아 결승까지 꾸역꾸역 올라가자 반신반의했던 마음은 환호로 바뀌었고, 새벽을 밝히는 이들도 차츰 늘었다. 하나로 뭉친 선수와 감독의 전술이 결합돼 기대를 뛰어넘는 성적을 낸 보기 드문 팀이었다. 성적과 별개로 준비 과정부터 훈훈한 마무리 이벤트까지 시선을 끄는 요소도 충분했다. 여운 역시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성과뿐 아니라 그에 이르는 과정까지 새로운 목표를 제시한 팀으로 부를 만하다. 반면 신화에서 멀어지는 경우도 같이 목격했다. 윤덕여호는 과거 신화 창조의 주역을 데리고 여자월드컵에 나섰지만 조별리그 3전 전패로 대회를 마쳤다. 대회에 참가한 지소연 여민지 등은 2010년 U-20 여자월드컵 3위, 같은 해 U-17 여자월드컵 우승 멤버였다. 상당수가 16강에 올랐던 2015년 월드컵에서 뛰어 경험에서도 뒤진다고 보기 어려웠지만 노르웨이전 1골이 유일할 정도로 결과와 내용이 좋지 못했다. 전날 남동생들의 시끌벅적한 금의환향과 대비되면서 더 쓸쓸한 뒷모습을 남겼다.

이러한 차이는 두 팀의 현재 모습에서 크게 기인했지만 근본적으론 남자 유소년 축구와 여자 축구가 서 있는 토대의 차이가 기저에 깔려 있다. 정정용호에 앞선 U-20 남자 대표팀은 본선 진출에 실패한 적도 많았지만 2009년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해 18년 만에 8강에 오른 것을 비롯해 2013년 대회에서도 8강에 올랐다. 2009년 이후 본선 진출에 실패한 건 2015년이 유일했다. U-17 남자 대표팀도 2009년 22년 만에 8강에 올랐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활성화된 장기적인 유소년 정책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K리그의 유소년 시스템, 대한축구협회의 골든 에이지 프로그램 등도 이후 남자 유소년 축구 성장의 발판이 됐다.

고(故) 이광종 감독 같은 탁월한 유소년 지도자도 나왔다. 정 감독도 지도자로 변신한 이후 유소년 전문 지도자로 외길을 밟았다. 정 감독은 U-20 월드컵 결승 진출 이후 “유소년 지도자 생활을 한 지 10년이 넘었다. 이제 비로소 체계가 잡혀간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여자 축구는 2010년 연령별 대표팀의 연이은 돌풍으로 주목을 받았음에도 그루터기는 오히려 약해졌다. 2009년 출범한 WK리그는 올해 10주년을 맞았지만 리그 양대 축이었던 이천 대교가 2017년 해체됐다. 대표 선수들을 키워낼 자양분이 되는 초·중·고 선수들은 늘기는커녕 줄었다. 나아가지 못하니 자연스럽게 세계 흐름에서 뒤처졌다. 2010년 주역들의 출전 여부가 불분명한 다음 대회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벌써부터 나온다.

상반된 결과는 서로에게 자극이 될 수 있다. 당장 팀을 정비하고 세대교체를 해야 하는 여자 축구로선 장기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실행해야 하는 과제를 안았다. 그러기 위해선 2010년의 열기 속에서 여자 축구에 대한 지원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가 사그라들었던 전철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남자 유소년 축구는 방향의 옳음을 확인한 만큼 일회성 신화에 그치지 않도록 점검하고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현길 스포츠레저부 차장 h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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