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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고세욱] 얘들아, 꾸역꾸역 가자



지금까지 전국, 남녀노소가 온통 스포츠 대회에 열광한 것을 딱 두 번 목격했다. 2002 한일월드컵과 멕시코에서 열린 1983 세계청소년축구대회. 올림픽과 월드베이스볼클래식 등 몇몇 대회의 인기도 많았지만 열기와 감동, 화젯거리 등을 종합했을 때 4강 신화를 이룬 두 대회에 미치지는 못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본 세계청소년축구대회는 ‘스포츠에 푹 빠진다’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태어나서 처음 느낀 이벤트였다. 당시만 해도 외국 선수들과 체격 차이가 많이 났음에도 우리 팀이 축구 강국을 잇따라 격파한 것에 대해 어린 나이에 엄청 뿌듯해했다. 멕시코 고지대에서 지칠 줄 모르고 뛰는 체력, 게임에서 볼 법한 패스와 돌파. 소년의 눈에 6~7세 많은 형들의 기량은 신기할 뿐이었다.

오전에 주로 열린 경기를 보기 위해 쉬는 시간에 TV가 있는 교무실이나 인근 문구점에 가곤 했다. 다른 반에서 환호성이 들리면 같이 소리를 지르기 일쑤였다. 대표팀 경기력에 대한 놀라움은 19년이 지난 2002년 월드컵을 겪고 나서야 깨졌다.

2019년 6월은 어떻게 기억될까. 36년 전 선배의 역사를 넘어선 20세 이하(U-20) 월드컵 대표팀의 행보는 환상적이었다. 다만 국민적 관심으로 볼 때 역대급 정도는 아니었다. 결승전 당일 곳곳에서 응원 열기가 뜨거웠지만 매 경기 밤샘 거리응원이 잇따랐던 2002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탈출구 성격으로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1983년 대회보다 차분한 편이었다. 최근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와 메이저리그에서 손흥민과 류현진의 맹활약 등 한국스포츠의 쾌거가 잇따른 것도 흥분을 분산시켰다.

그러나 팀으로서의 스토리와 매력은 앞의 두 대회를 넘어선, 역대 최고 수준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프로 2부리거와 대학생이 적지 않은 팀을 프로 경력이 전무한 무명의 감독이 지휘했다. 조별 예선 통과만 해도 다행이라 했는데 극적 드라마를 쓰며 원정 준우승을 차지했다. 영화로 만들어도 될 시나리오다. 선수들은 4강전 승리 후 버스 안에서 떼창하고, 결승전을 앞두고 가진 훈련 도중 싸이의 ‘챔피언’을 들으며 몸을 흔들어댄다. 주요 경기를 앞둔 비장감이나 긴장감은커녕 웃음과 장난기 가득한 ‘축구 신인류’다. 그럼에도 경기에 뛰지 못하는 동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공감과 배려의 정신은 충만하다.

‘막내형’ ‘자율 속 규율’ 등 대표팀에서 나온 말의 성찬을 감상하는 것도 즐거웠다. 특히 개인적으로 정정용 감독의 “우리는 꾸역꾸역팀이다. 쉽게 지지 않는다”라는 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사실 ‘꾸역꾸역’은 U-20 대표팀이 대회 전까지 약팀에도 어렵게 이긴다며 힐난조로 쓰인 단어였다. 그런데 이번 대회에서는 ‘포기하지 않고’ ‘원팀으로 힘을 합쳐’ ‘어떻게든 승리하는’ 팀의 상징어로 반전됐다.

이는 우리 사회, 특히 선수들의 또래로 볼 수 있는 20대 청년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 20대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취업난 등으로 사회에 대한 불만·분노가 어느 세대보다 높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청년층(15~29세) 체감실업률은 24.2%로 사상 최고치였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조사 결과 20대 우울증 환자는 최근 5년 새 배 가까이 늘어났다. 자살자 수는 20대만 유일하게 증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U-20 대표팀이 보여준 ‘꾸역꾸역’ 정신은 어느 때보다 값지다. 실제 20대들이 이번 대회를 보면서 선수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는 반응이 많다. 36년 전과 달리 이강인보다 한 살 어린 아들을 둔 아버지로서 대표팀에 느낀 대견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17일 귀국 후 열린 축하행사에서 활짝 웃는 선수들의 얼굴을 보며 이런 말이 절로 우러나왔다. “아들들아, 너무 자랑스럽다. 힘들어하는 친구들 손잡고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다오.”

고세욱 스포츠레저부장 swk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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