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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칼럼] 위기 극복보다 더 큰 애국은 없다



신냉전의 미·중 패권전쟁, 기로에 서 있는 북핵 문제, 한계에 봉착한 경제성장…
세 갈래 복합위기 몰려오는데 정부 리더십은 긴박함이 없다
뜬금없는 김원봉 평가 문제로 이렇게 국론 분열시킬 때인가
총선용 정치공학 놀음 벗어나 위기대응 위한 통합에 나서야


대한민국에 다중 복합위기가 몰려오고 있다. 이 위기는 세 갈래에서 온다. 첫째, 신냉전시대로 가고 있는 미·중 패권경쟁에서 비롯된다. 둘째, 기로에 서 있는 북핵 문제와 북한체제 문제로부터 야기된다. 셋째, 갈수록 버거움을 드러내는 한국경제의 성장 한계에서 발생한다. 이것들은 우발적이라기보다 구조적이고, 서로 얽혀 상호작용하면서 향후 수십년간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가히 큰 전환기의 위기라 할 수 있다. 전환기에는 늘 여러 개의 통로가 있기 마련이다. 어떤 길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사막으로 빠질 수도, 비옥한 땅에 이를 수도 있다.

어떤 길을 걷느냐는 결국 국가 리더십에 달려 있다. 전환기의 국가 리더십이 나라의 운명을 바꿔놓는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충분히 입증됐다. 19세기 말 대변혁기에 우물 안 개구리였던 조선의 지도자들은 낮은 식견과 좌충우돌의 국가 운영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해방 이후에 만일 이승만 노선에 의해 대한민국을 수립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공산 치하에 살고 있을 것이고, 그 이후의 번영과 민주주의는 없었을 것이다. 1950년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9700달러로 세계 1위일 때 베네수엘라의 국민소득이 7400달러로 세계 4위였다. 한국은 80달러로 세계 최빈국 수준이었다. 지금 나라를 거덜낸 베네수엘라의 길과 인구 5000만명에 3만 달러 소득을 달성한 세계 일곱 번째 나라가 된 대한민국의 길은 국가 리더십의 비르투스(Virtus), 즉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 자체로 웅변한다. 물론 개인의 인생처럼 국가의 운명도 비르투스 못지 않게 포르투나(Fortuna), 즉 운이 작용한다.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일수록 더욱 그렇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우리가 제어할 수 없고, 북한체제 문제를 우리가 좌우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포르투나를 핑계 삼아 비르투스를 발휘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하고 정당화될 수 없다. 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리더십을 우리는 무능한 리더십이라 부른다.

큰 전환기의 리더십은 참으로 탁월해야 한다. 복합 위기의 해법은 일차방정식으로는 풀 수 없다. 고차 함수로 풀어야 한다. 그 함수를 풀어야 하는 국가 리더에게는 고도의 비르투스가 요구된다.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 비전을 제시하는 혜안, 국민의 생각을 모아내는 통합력, 정쟁을 최소화하는 정치력, 위험을 무릅쓰고 장애물을 걷어내는 담대한 용기 등이 위기를 헤쳐 나갈 리더의 덕목들이다.

지금 이 정부의 리더십에 이런 덕목이 발휘되고 있는가?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다. 우선 긴박함이 도무지 보이질 않는다. 미·중 갈등이 미칠 파장이 엄청난 데도 대책 없이 불구경하듯 한다. 어쩌면 북한 비핵화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 마지막 기회가 오고 있는데, 여전히 북한 달래기에만 급급하다. 경제위기의 경고등이 켜진 지 오래인데, 좋아질 거라는 말만 반복하다 이제야 하방 위험을 거론한다. 이 정권의 상황인식은 태풍 경보를 내려야 할 판에 ‘곳에 따라 한때 비 오는 곳이 있겠다’는 하나마나한 기상예보를 듣는 듯하다.

위기를 직시하지 못하니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이 나올 수 없다. 머리를 맞대고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우리 잘 못한 것 없다’는 변명에 바쁠 뿐이다. 반면에 좁은 의미의 ‘정치’에는 고도의 집중력을 보인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선거에만 눈이 가 있는 것이다. 위기에 협치가 필수적임을 안다면 국회를 정상화할 야당 대표와의 만남의 형식을 갖고 저렇게 인색하지는 않을 것이다. 국회의장에게 남의 말 하듯이 국회 정상화해 달라는 면피성 주문만 남기고 순방길에 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국민들의 단합이 위기 극복의 에너지임을 안다면 뜬금없는 김원봉 평가 때문에 국론을 이렇게 분열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작년 역대 최대의 55조원이 해외 투자로 빠져나가고, 곳곳에서 더 이상 기업 못하겠다는 소리가 넘치는데 비상경제대책회의 한 번 안 열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정권이 열중하고 있는 정치적 코드를 해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친일 대 반일, 독재와 민주의 구도를 되살려 자유한국당을 고립시키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다중 복합위기가 몰려오는 지금은 그런 정치공학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총선을 위한 정치공학이 신선놀음이라면 그 놀음에 썩는 도끼자루는 국민의 안위와 국가의 존망이다. 위기가 가중되면 정치공학도 무용지물이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위기대응 태세를 분명히 해야 한다. 제1 야당을 고립시키려 들지 말고 진심으로 협력을 구해야 한다. 다중 복합위기를 극복해낼 지혜를 최고의 전문가들로부터 모으고 위기 타개를 위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국민에게 고통 분담도 요청해야 한다. 애국 앞에 보수와 진보가 없다는 발언이 진정성을 얻으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위기를 극복하는 것보다 더 큰 애국은 없다. 그것이 정권도 살고 나라도 사는 길이다.

박형준 동아대 교수·전 국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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