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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정현수] 쌀의 처지



지난달 중순, 처가에 내려갔다가 모내기를 도왔다. “사위는 쉬고 있어.” 장모님이 한사코 말렸지만, 차려주신 밥값은 해야지 싶었다. 살면서 모내기는커녕 논을 유심히 본 일도 없다. 그래서 ‘6000평’이라는 말을 듣고도 그 규모가 선뜻 가늠되질 않았고, “금방 끝날 거야”라는 설명에서 ‘금방’이 몇 시간을 뜻하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얼마나 고될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논에 나갔다. 예상과 달리 작업 대부분은 이앙기가 대신했다. 뒤에 모판을 실어주면 이앙기 꽁무니에 달린 모내기장치가 모를 적당한 포기로 나눠 일정한 간격으로 땅에 심어줬다. 어린 모가 잘 자라도록 비료를 뿌려주는 작업까지 동시에 이뤄졌다. 내가 할 일이라곤 이앙기에 모판이나 비료가 떨어지면 신속히 채워주는 정도가 전부였다. 처가 큰외삼촌은 “기계 없던 시절에 어떻게 논농사를 지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무리 기계가 좋아졌다 해도 사람의 정성은 필요한 법이다. 큰외삼촌은 모판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하거나 누렇게 뜬 모들을 솎아내느라 연신 바쁘게 움직였다. 기계가 닿지 않는 논 모서리에는 사람이 직접 모를 심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모를 얼마나 촘촘하게 심을지, 한번 심을 때 몇 포기나 심을지, 비료는 얼마나 뿌려야 적당할지 오랜 농사 경험을 바탕삼아 판단해야 했다. 모 간격이 너무 좁으면 통풍이 제대로 되지 않는 까닭에 올해는 작년보다 덜 촘촘하게 심기로 했다. 모를 다 심고 나서도 매일 새벽 물이 제대로 들어오는지 확인해야 하고, 때맞춰 약도 치고, 비료도 다시 뿌려야 한다. 그런 뒤에도 볕이나 비가 모자라거나 과하지는 않을까 늘 근심해야 할 테다.

태풍 같은 변수만 없다면 그날 심은 모들은 10월까지 무럭무럭 자라 시장에서 팔릴 것이다. 그러나 들인 정성만큼 쌀이 제대로 대접을 받을지는 모르겠다. 사람들은 갈수록 쌀을 덜 먹는데, 기계화에 힘입어 공급은 늘면서 쌀은 애물단지 취급을 당하는 중이다. 가격이 갑자기 떨어질까 봐 정부가 2014~17년 사들인 쌀이 122만t이나 창고에 쌓여 있다. 2017년 180만t 수준보다는 낮아졌다지만 적정 재고량 80만t을 계속 웃도는 수치다. 공급과잉이 누적되고, 정부의 시장격리 정책이 뒤따르면서 쌀값은 늘 뒤죽박죽이었다. 농림축산식품부의 한 담당 공무원은 “최근 십수년간 쌀값이 불안정하지 않은 해가 한 번도 없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정부는 쌀 재고량을 어떻게든 줄여보려 하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다. 두 달 전 강원도에서 큰 산불이 났을 때 농림축산식품부는 피해를 본 각 지자체에 쌀을 지원하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정작 지자체는 중앙정부의 지원을 거부했다고 한다. 온갖 기업과 민간단체들이 아예 도시락을 만들어 피해 주민들에게 배달해 주는 판국에 지자체가 쌀을 받아봐야 창고만 차지하는 처치 곤란밖엔 안 된다는 계산이 섰던 게다.

또 최근에는 여전히 식량난이 가시지 않은 북한에 쌀 지원 방안이 논의됐었다. 하지만 마치 남는 쌀 가지고 생색내지 말라는 듯 북한이 쏘아 올린 미사일에 더 구체적인 논의는 이뤄지지 않는 분위기다. 한쪽에서는 한국 정부가 북한에 쌀을 몰래 지원해 쌀값이 급등했다는 가짜뉴스가 도는데, 정작 북한에서는 쌀을 정식으로 요구하지 않았다고 하니 쌀의 처지만 참 애석하다.

만성적인 쌀 공급과잉으로 발생하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꽤 명확한 편이다. 농민들이 논농사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지금의 직불제를 개편하는 방안이다. 논농사에 집중된 직불제 비중은 점점 줄이는 대신 자급률이 낮은 밭작물 재배에 지원하는 직불금 비중을 높여가는 방법이다. 논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자연스럽게 밭작물 재배로 전환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이다.

이미 문재인 대통령이 ‘공익형 직불제’라는 이름으로 내건 공약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산 규모를 두고 기획재정부와 농림부가 이견을 보이고, 나서서 이를 조율해야 할 국회는 정쟁에만 몰두하고 있다. 지난해 말에 진작 정했어야 할 쌀 목표가격조차 아직 설정하지 못했다고 하니 더 할 말이 없다. 그 탓에 지난해 10월 추수한 쌀에 대한 직불금 사업은 아직 집행도 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러니 최근 쌀값이 꽤 회복됐다고 해도 농민들이 쉬이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 아니겠는가.

정현수 경제부 기자 jukebox@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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