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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장은수] 샤일록의 혁신인가, 포샤의 혁신인가



네 사람째 극단적 선택이 있었다. 카카오나 타다 같은 ‘자가용 호출이용 플랫폼 업체’와 택시업계의 갈등 탓에 불쌍한 목숨들이 스러지는 중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더 이상 입이 없다. 하지만 죽음을 단지 물리적 소멸로 받아들이지 않고, 죽은 자가 보내는 말들을 숙고함으로써 산 자의 세상은 성립한다. 죽은 자가 남긴 목소리가 무엇일까를 각자 숙연히 생각하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라캉에 따르면 “언어 활동을 통해 우리의 메시지는 ‘타자’로부터 우리에게 도달한다. 그것도 역전된 방식으로”. 우리는 죽은 자한테 자신이 바라고 꿈꾸는 것을 ‘투사’하고, 그 입술을 빌려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죽음 너머의 세상에 사는 이들로부터 무슨 말을 듣느냐는 한 사람의 가장 적나라한 내면을 보여준다. 어떤 이의 죽음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느냐가 한 사회의 문명 수준을 결정한다.

타다를 서비스하는 이재웅 쏘카 대표는 뭐라고 했던가. “자율주행 시대가 오면 택시업계가 지금보다 많이 축소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혁신을 하다 보면 전통 산업은 어쩔 수 없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으니 나중에 사회적 비용을 더 치르지 않도록 정부가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택시업계 반발을 의식해 “죽음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죽음을 정치화하고 이익을 위해 죽음을 이용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면서도, “저희 플랫폼에 들어오는 것과 감차 말고 어떤 연착륙 방법이 있는지 모르지만”이라고까지 이야기했다. 악어의 눈물이요, 샤일록의 언어다. 법 테두리 안에서 사업을 벌였으니 채무자의 살 한 덩어리를 떼어내겠다고 칼을 들고 설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을 ‘당연한 승자’로 여기는 마음이 담긴 말이니, “무례하고 오만하다”는 비판을 들을 만했다.

혹여나 대단한 상생 방안이라도 마련해 둔 줄 알았다. 택시업계가 바라는 해결책 중 하나인 자가용 호출이용 플랫폼 업체가 택시 면허를 사들여 사업을 하면 어떠냐는 사회적 제안이 잇따르자, 이 대표는 택시기사들이 “면허 매각 후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우니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논의 없이 택시 면허만 돈 주고 사면 갈등이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그가 생각한 방안은 결국 직업을 잃고도 아무도 생계를 걱정하지 않는 사회보장제도였던 셈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플랫폼 실업이 사회 문제가 되지 않도록 확실히 정부는 적절한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재 국면에서 타다가 ‘이미’ 승자가 된 걸 전제로 하는 샤일록의 언어를 좇을 이유 또한 없다. 타다가 피를 흘리지 않고 살을 도려낼 방법을 찾으라고 하는 포샤의 판결도 있을 수 있다. 독일 스페인 덴마크 벨기에 등과 같이 적절한 대안을 마련할 때까지 타다나 우버 같은 자가용 호출이용 서비스를 중단하고 기술 혁신과 사회 혁신의 연결고리를 점진적으로 재설계하는 논의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무엇보다 타다의 경우, 아무리 생각해도 세금을 치러 사업을 서둘러 도울 만한 혁신이 있는지 모르겠다. 국부 총량을 늘리는 것도 아니고, 기존 택시보다 적은 비용으로 질 높은 서비스를 이용하도록 하는 것도 아니다. 해외에 진출해 성공할 가망성도 높아 보이지 않는다. 모바일 기술을 사용해 소비자 편의성을 높인 부분은 있지만 기술 혁신은 없다. 이용료를 20% 정도 더 받는 대신, 때때로 무례하고 때때로 불결하고 때때로 위험한 현행 택시 서비스 행태를 개선한 프리미엄 서비스 수준이다. 이는 모범택시로도 이미 가능하다. 부의 사회적 분배도 기능이 아주 약하다.

보도에 따르면, 타다 기사들 시급이 1만원 정도다. 4대 보험이나 퇴직금이 없다. 사고 나면 면책금 50만원도 기사가 부담한다. 일자리 창출에는 오히려 역행한다. 특이점이 있다면, 대다수 서민인 택시기사들이 나날이 버는 적은 돈을 한 회사에 집중시켜 독점화하는 구조라는 것뿐이다. 이것이 혁신이라면 샤일록의 혁신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다. 많든 적든 자기 사업이 한 원인을 제공한 이의 죽음을 놓고 의기양양한 목소리를 내는 이는 신뢰하기 어렵다. 죽은 자에 대한 애도가 없다면 산 자에 대한 존중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 더 이상 죽음이 없으려면 우리 사회에는 지금 포샤의 혁신이 필요하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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