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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권혜숙] 봉준호: 더 비기닝



“영화는 무슨, 중장비기사 자격증을 알아볼까.” “제과제빵 기술이 좋다던데.” 20여년 전 충무로의 한 호프집에 이런 대화를 나누던 두 청년이 있었다. 한 명은 영화 ‘베테랑’으로 1300만 관객을 모은 류승완 감독이고, 제빵사를 권한 다른 청년은 ‘칸의 영웅’ 봉준호 감독이었다.

영화 ‘기생충’으로 제72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커리어의 정점에 오른 봉 감독의 시작이 어땠는지 궁금해졌다. 한국영화감독조합이 감독 17명을 인터뷰해 펴낸 ‘데뷔의 순간’과 이전의 신문 인터뷰들을 보면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후 ‘살인의 추억’으로 34세에 스타 감독이 되기까지 8년 동안, 그의 처음은 이렇듯 대부분의 청년처럼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고민, 서투름으로 가득했다. 1년쯤 백수로 지냈고, 존경하던 장선우 감독의 연출부에 지원했다 떨어졌으며, 가장이 됐지만 생활이 어려워 동창에게 쌀을 빌린 시간이 있었다.

연출부로 처음 출근하던 날의 일화는 웃음을 자아낸다. 슬레이트 치는 걸 집에서 몇 번이고 연습했지만 정작 첫 슬레이트를 치는 순간 긴장한 나머지 새끼손가락이 끼어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는 것이다. “그런 것도 NG를 내냐”는 놀림에 얼굴이 새빨개졌다고 한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에 대해 스스로 “쫄딱 망했고 비평에서도 썰렁한 반응을 얻었다”고 했다. (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서울에서 누적 관객 5만7469명인 것으로 나온다. 관련 기사에서는 전국 10만 관객의 성적을 냈다고 언급된다.)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충무로 호프집 동지’였던 류승완 감독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공개됐고, 영화는 극찬을 받았다. 봉 감독은 “솔직히 많이 부러웠고, 대조적인 결과를 보면서 우울증에 빠졌다”고 했다.

그래서 두 번째 작품인 ‘살인의 추억’ 성공 직후 인터뷰에서는 “두 작품으로 극과 극을 오가는 체험을 했다. 그래서 담담하다. 나는 앞으로도 영화를 만들고 때론 성공하고 때론 망할 것이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괴물’과 ‘마더’ ‘설국열차’ ‘옥자’, 그리고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를 즐겨온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그는 한 번도 망한 적이 없었다.

사실 ‘플란다스의 개’ 역시 홍콩영화제 국제영화비평가상과 뮌헨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으니 실패작이라고 할 수 없다. 과작(寡作)이 대부분인 우리 영화계에서 봉 감독처럼 3~4년 간격으로 작품을 꾸준히 내놓는 것도 드물고, 감독들이 가장 바란다는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듣는 것은 더구나 드문 일이다.

봉 감독을 설명할 때 ‘천재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마더’를 같이 찍은 김혜자는 “천재라는 말이 남용돼서 별로 안 좋아하는데, 봉 감독은 진짜 천재”라 했고, ‘설국열차’에 출연한 배우 크리스 에번스는 “급이 다른 천재”라고 치켜올렸다. 프랑스의 권위지 르몽드는 ‘기생충’에 대해 “봉준호는 가족영화의 전통을 살리면서도 특유의 다양한 천재성을 발휘했다”고 평했다.

하지만 봉 감독은 28일 ‘기생충’ 시사회 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집착이 강한 성격이라 영화를 좋아하다 보니 계속 영화를 찍게 되고, 오늘날 이렇게 좋은 배우들을 만나게 됐다”고 했다. 책 ‘데뷔의 순간’에서는 “영화감독이 되기로 한 후 그냥 직진만 해왔다”며 “이미 발을 내디딘 이상 그저 묵묵히 매사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러니 ‘직진’과 ‘집착’을 그의 키워드로 꼽아도 좋을 것 같다.

‘말아톤’의 정윤철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머릿속에 장면을 먼저 떠올리며 영화화를 생각하는 봉 감독의 작업 방식이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와 비슷하다고 했다. 바라건대 그가 걷는 길은 이마무라 쇼헤이와 비슷하기를. 이마무라 쇼헤이는 ‘나라야마 부시코’와 ‘우나기’로 아시아 감독으론 유일하게 황금종려상을 두 번 수상한 감독이다.

권혜숙 문화부장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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