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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서-정진영] 가나안 신자 A국장



한동안 교류가 없었던 A를 다시 만난 건 지난해 이맘때쯤이었다. 그는 경제 분야 ‘권력기관’의 요직 국장을 두루 지낸 인사였다. 공직 말년에 수뢰 혐의로 구속 기소돼 고생하다 대법원의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참 허무하더군요. 누구보다 깨끗하게 공무원생활을 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참혹한 일을 겪다 보니 인생이 과연 뭔가 싶습디다.” 송사에 시달린 이후 꽤 세상과 담을 쌓았다가 옛 출입기자였던 내게 연락을 한 이유는 의외였다. “국민일보 종교국장이 됐다는 사실을 알고 전화를 했다”고 했다. 어리둥절해하는데 근황을 얘기했다.

A국장은 “요즘은 하루하루가 ‘오직 예수’”라고 했다. 매일 새벽 기도와 성경 읽기로 하루를 시작하고 낮과 저녁에는 국민일보 미션라이프와 기독 방송매체를 통해 말씀을 접하고 금요일 밤에는 가까운 교회의 철야예배에 참석한다는 것이다. 모태신앙임에도 잘나가던 관료 때는 신앙과 거리가 좀 있었다고 털어놨다. 수감생활이 신앙을 영글게 했음이 분명했다. 이런저런 신앙 얘기를 나눠볼 심산으로 만나자고 한 것 같았다. 출석하는 교회를 물었더니 대답이 예상 밖이었다. ‘가나안’ 신자라는 것이다. 성경 읽고 묵상하며 좋은 말씀을 들으면 됐지 교회에 꼭 출석할 필요가 있냐고 반문했다. 그는 한국교회가 교권주의에 사로잡혀 있고 세상과의 소통에 인색하며 배타적이라고 주장했다. 항변했지만 귀담아듣지 않았다.

가나안은 교회에 ‘안 나가’를 거꾸로 발음한 조어다. 한국교회의 실태를 비꼬는 뉘앙스마저 풍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찾아다녔듯 ‘입맛에 맞는’ 교회를 고민하며 교회 출석을 망설이는 것을 비유한다고도 하나, 이는 교회 입장에서 자위적 의미를 담아 해석한 것이다. 2주 전쯤 오랜만에 다시 연락이 오갔다. A국장은 여전히 가나안이었다. 신앙생활의 열매는 교회생활을 통해 수확된다는 내 말에 호응하지 않았다. 명문대, 행정고시, 고위 관료를 지낸 엘리트인 데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인사가 가나안이란 사실이 아쉬웠다. 한국교회가 맞닥뜨린 어두운 현실을 그대로 함축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나안 신자 수를 정확히 셀 수는 없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등 교계 여러 기관의 조사 결과 100만명쯤으로 추산되거나 200만명 이상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전체 개신교인의 20%가 넘는다는 측도 있다. 가나안 교인 문제는 최근 1∼2년 사이 일어난 현상이 아니다. 전통적인 교회와 목회자의 틀이 바뀔 수밖에 없는 시대적 변화를 감안하면 이들의 등장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흐름과 추세가 점차 더 공고해지는 분위기여서 걱정이다. 전반적으로 종교에 대한 만족도가 낮은 젊은 가나안 성도가 더 많은 것으로 파악된다는 사실은 교회의 미래를 암울하게 한다.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교회를 떠난다는 얘기까지 접하면 암담하다. 권위적인 목사, 지나친 교세 확장 분위기, 교인 상호 간 갈등, 목회자의 언행 불일치와 일탈 등 교회를 벗어나는 원인이 다양하지만 한마디로 ‘교회 또는 목사가 싫다’는 것이다.

가나안 신자와 관련된 여러 자료를 보면 공통점이 있다. 언젠가 교회를 다시 찾고 싶어하는 비율이 꽤 된다는 것이다.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정재영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이들의 상당수는 구원의 확신을 갖는 정체성이 뚜렷한 기독교 신앙인이다. 무척 다행스럽다.

현실 진단이 가능하고 고무적인 기대감이 확인됨에도 한국교회의 대응은 소극적이다. 교단이나 연합기구 등 교계가 적극 대처하는 모습은 찾기 어렵다. 이런 현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심지어 평가절하한다. 가나안 성도 확산 움직임은 신도 감소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개신교 전반에 대한 냉소와 불신으로 이어져 탈교회화를 부추기고 심화시킨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최근 일련의 정치적 사안에 일부 목사와 교회, 교계 관계자들이 잇따라 ‘논란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교회가 갱신되고 목회자가 각성해도 시원찮은 마당에 여론의 시시비비를 따지게 만드는 일에 발을 담그는 것은 큰 잘못이다. 한국교회 앞에 놓인 큰 과제를 말할 때면 늘 이단, 사이비, 동성애, 무슬림을 거론한다. 가나안 현상은 딱 그 정도의 무게로 한국교회를 짓누르고 있다.

정진영 종교국장 jy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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