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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박상익] 후세를 두려워하라



올해는 생물학자 찰스 다윈의 탄생 210주년 되는 해다. 1809년생인 다윈의 동갑내기로 윌리엄 글래드스턴이란 정치인이 있었다. 19세기 후반 네 차례에 걸쳐 영국 총리를 지낸 걸출한 인물이다. 빅토리아시대의 명재상이자 권력 실세인 그가 친히 다윈의 자택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다윈의 학문적 업적을 치하하기 위해서였다. 거물 정치인의 방문을 받은 다윈은 감격을 금치 못했고, “그토록 위대한 인물의 방문을 받았다는 건 얼마나 명예로운 일인가”라는 소감을 남겼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이 에피소드를 색다르게 해석한다. 다윈이 권력자의 방문을 명예롭게 여긴 것은 그의 겸손한 성품을 보여주지만, 달리 보면 그것은 다윈에게 ‘역사적 안목’이 결여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당대의 시각’으로 보면 다윈이 명예롭게 여기는 게 맞을지 모르나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바라본다면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할 사람은 다윈이 아니라 오히려 글래드스턴이라는 것이다.

러셀은 당대의 평가와 후대의 평가가 같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지금 당장 길거리에 나가 아무나 붙잡고 “글래드스턴이 누군지 아느냐”고 질문해 보라. 안다고 말하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윈을 모른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진화론을 설파하여 막대한 역사적 영향을 미친 생물학자 다윈을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래드스턴과 다윈의 경우에서 보듯이 한 인물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객관적인 평가가 되기 어렵다. 당대와 후대의 평가가 180도로 바뀌는 경우도 허다하다. 인물에 대한 평가는 관 뚜껑에 못을 박은 뒤에나 가능하다는 말 그대로다. 다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영국에서 손꼽히는 명의였다. 특히 할아버지는 국왕 조지 3세가 주치의를 맡아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뛰어난 의사였다. 그러나 이렇듯 저명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다윈은 학창 시절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다. 당연히 가업인 의학에도 소질을 보이지 않았다. 다윈의 부친은 아들에게 쌀쌀맞게 말하곤 했다. “너는 사냥과 개 경주와 쥐잡기 말고는 관심이 없구나. 그러다간 너 자신과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하겠다.”

다윈의 아버지는 ‘가문에서 가장 아둔한 아들’을 성직자로 만들던 당시 영국 사회의 관행을 따르기로 한다. 그래서 다윈은 성직자가 되기 위해 1827년 케임브리지대에 입학한다. 이렇듯 어린 시절 열등생 소리를 듣던 다윈은 섭리라고밖에 할 수 없는 우연에 의해 해양탐사 측량선 ‘비글호’에 승선하면서 생물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다윈이 일찌감치 공부 재능을 인정받고 의사의 길을 걸었다면 아마도 지극히 평온하고 안락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200년이 지난 지금 누가 그의 이름을 기억할까. 다윈 자신을 위해서나 인류를 위해서나 가업을 잇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한 인간을 근시안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알 수 있다.

매스컴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인물과 사건들이 역사의 흐름을 온통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러셀의 ‘역사적 시야’로 보면 진정한 가치는 다른 데 있을지 모른다. 100년, 500년 뒤에는 당대 거물들의 이름은 존재감이 없어지고, 당대에는 존재감도 없던 과학자나 예술가나 작가의 이름만이 기억될지 모른다.

정치가 중요치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문화 예술 정책의 상당 부분이 정치권에서 결정되기에 정치인에게 역사적 혜안과 통찰이 더욱 절실히 요청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4년, 5년짜리 임기와 다음 선거에만 정신이 팔린 정치인들은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암적인 존재에 다름 아니다. 하물며 사욕과 당략에 매몰되어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려 하는 일부 정치세력은 역사의 시궁창에서 허우적대는 기생충에 지나지 않는다.

박상익(우석대 초빙교수·역사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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