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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박재찬] 희망팔이 대한민국



‘해외 고수익 알바.’ 장모(29)씨는 지난해 12월 인터넷에서 이 광고 문구에 끌려 보이스피싱 사기 범죄에 가담했다. 중국 옌볜까지 날아가 그가 한 일은 대포통장을 모으는 것이었다. ‘이건 아니다’ 싶어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김모(26)씨는 페이스북에서 보이스피싱 모집책이 남긴 ‘단기간 고소득 알바’ 글을 보고 범죄 나락으로 빠졌다. 금융감독원 직원을 사칭하면서 피해자들의 돈을 챙기다가 붙잡혀 올 초 실형을 선고받았다. 사기꾼에 속아 사기를 치다가 사기범으로 전락한 것이다.

사람들은 왜 사기꾼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까. 사회심리학자 마리아 코니코바의 분석이 그럴 듯하다. 그녀는 저서 ‘뒤통수의 심리학’에서 사기꾼이 파는 것은 ‘희망’이라고 했다. 물론 사기꾼이 건네는 희망은 신기루일 뿐이다. 하지만 ‘미래의 나는 과거의 나보다 훨씬 나은 존재가 돼 있을 것’이란 믿음을 부추겨 희망으로 여겨지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믿음과 희망은 힘이 세다. 짐작컨대 보이스피싱 알바를 모집하는 사기꾼은 단기간 고수익 보장이라는 환상을 믿게끔 청년들을 꼬드겼을 것이다. 사기꾼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간 청년들은 단기간에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데 희망을 품었을 테다. 이들로부터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도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생각보다 낮은 금리로 예상보다 많은 돈을 빌릴 수 있다니, 이제 자금 사정이 좀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을 안고서 사기꾼의 말을 철썩 같이 믿었음이 분명하다. 실제 보이스피싱 범죄 가운데 저금리 대출을 빙자한 사기로 당한 피해가 70%나 된다.

정부는 보이스피싱 범죄를 막겠다고 대책을 연거푸 내놓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사기 수법이 날로 진화하는 탓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4440억원. 역대 최고치다. 피해자수도 전년보다 50% 넘게 늘었다. 급기야 정부는 지난 16일부터 24일까지 보이스피싱 피해예방 안내를 휴대전화와 우편, 이메일로 전 국민에게 발송했다. 메시지를 받는 인원만 5600만명이다.

보이스피싱 사기꾼들의 거짓 ‘희망팔이’에 속아 넘어가는 피해자들이 증가한다는 건, 그만큼 서민 살림살이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방증 아닐까. 살림살이뿐 아니다. 연일 쏟아지는 뉴스는 암울한 소식이 대부분이다. 자녀 교육과 일자리·노후 대책이나 주기적으로 나오는 각종 경제 지표마다 걱정하는 목소리가 앞선다. 나아질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통로는 정부뿐이다. 고달픈 현실을 잠시나마 탈출하고픈 서민들의 ‘반짝 희망’은 로또뿐일까. 지난해 로또복권 판매액은 약 3조9700억원. 2002년 판매를 시작한 이후 최고치다.

업무 특성상 매일 같이 다른 신문들을 훑어보는데, 근래 들어 유독 눈에 띄는 게 몇 가지 있다. 유명 역술인이 기사와 전면 광고로 여기 저기 등장하는가 하면 정통 교단에서 비껴난 이단·사교 집단들의 교묘한 광고성 기사들도 슬쩍 슬쩍 보인다. 사람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기막히게 눈치 채는 부류들이다. 믿을 구석, 마음 둘 만한 데를 찾지 못한 이들이 많다는 얘기가 아닐까. 작금의 우리 사회, 우리 공동체가 염려스러운 이유다.

이 와중에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일가족이 극단적인 선택에 내몰린 소식들이다. 가정의 달에, 어린이날과 부부의날 어간에 벌어진 사건은 충격적이다. 경제적 어려움이 많았네, 파산 신청까지 알아봤네 하는 기사의 행간 속에서 수많은 법·제도는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혼자가 아닌 일가족이 죽음에 이르게 된 건 더없이 비극적이다. 결국 가족조차 남겨둘 수 없을 만큼 우리 사회가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 같아서다. 그 일을 하라고 뽑아 놓은 위정자들은 연일 입술과 혀로 수치만 늘어놓고 있다. 사기꾼들의 희망팔이만 득세할 수밖에 없는 걸까.

박재찬 경제부 차장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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