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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을 때



넘어선 안 될 선이라는 게 있다. 요즘 정치권에선 하루가 멀다고 선을 넘는 모습이 보인다. 종북 좌파, 빨갱이에다 독재자라는 호칭조차 아무렇지 않게 시도 때도 없이 사용된다. 기독교 신앙인을 자처하는 야당 대표의 독한 말은 날이 갈수록 더 독해진다. 서울법대를 나와 판사로, 4선 국회의원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여성 정치인의 성적 의미가 담긴 비속어 발언은 도무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아연할 뿐이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상식적으론 이해하기 어렵지만 ‘정치판 논리’를 대입해보면 그렇게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국회의원의 최대 관심사는 재선이요, 정당의 최후 목적은 차기 정권 창출. 그러니 1년 앞으로 다가온 총선을 생각하면 좋은 이미지나 정치적 비전이 중요할 리 없다. 당장 선거 때 그들을 찍어줄 확실한 지지층의 마음을 사는 것이 급선무다.

50%를 확보하면 이기는 선거판에서 정치인들은 70~80%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정말 굳은 정치적 신념으로 국민 대통합을 외치는 정치인이 있다면 모를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정치는 그저 내 편이 돼줄 사람들의 구미에 맞게 행동하면 되는, 저급한 일이 돼버렸다. 그러니 그들이 내뱉는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치인으로서도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어떤 이들인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설령 정도를 넘어섰다 해도 ‘종북 좌파’ ‘빨갱이’라는 말에 반응하는 이들이 내 편이라면, 그 말을 조심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21세기에 이념적인 편 가르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헤집는 단어가 정치권의 일상어가 되는 세태에 할 말을 잃을 뿐이다.

정치권의 이런 행태만큼 당혹스러운 일이 요즘 기독교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의미를 다 헤아리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진리냐 비 진리냐를 가르는 ‘이단’이라는 용어는 기독교 신앙인에게는 큰 무게감이 있는 단어다. 빨갱이라는 말 한마디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빼앗겼던 역사가 있었다면,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선 ‘이단’이라는 그 한마디가 많은 이들의 생명을 좌지우지했다.

그런데 요즘 그 이단이라는 단어가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한다. 국내 최대 교단 중 하나인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 교단은 최근 국내 여러 선교단체와 신학전문 출판사의 대표가 이단일지 모른다며 조사를 벌였다. 기껏 불러놓곤 정확하게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채 대상자에게 따져 묻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연출됐다고 한다. 예장합동 교단의 ‘이단(사이비)피해대책조사연구위원회’의 활동이 진짜 이단으로부터 성도를 보호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자기들 입맛에 맞지 않는 이들을 배제하고 낙인찍기 위함인지 판단하지 못할 정도로 세상은 어리숙하지 않다. 더구나 해당 단체와 출판사를 문제 삼으려면 그들을 후원하고 연합해서 활동하는 예장합동 교단 소속 교회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일까. 어떤 결정을 내려도 자기 발등 찍기가 될 사태를 만들어놓고 어떻게 수습해나갈지 궁금하다.

그뿐만 아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지난 3월 예장합동과 통합 등 주요 교단이 이단으로 판정했던 한 교회를 덥석 받아들였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이단으로 판정했다 해제했다 하는 것을 보면, 기독교 내부는 물론 외부에서도 누가 이단 판정의 권위를 인정할지 의문이다. 더구나 최근 시사방송을 통해 드러난 이 기관 대표회장의 행태는 목사가 아니라 B급 정치꾼을 연상시킨다.

그동안 누적된 정치권의 막말과 도를 넘은 작태는 자기편 결속이라는 즉각적 효과를 안겨줬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젊은 세대의 정치 혐오를 불러왔다. 상식과 이상을 가진, 좋은 사람들은 갈수록 정치권에 발을 디디려 하지 않는다.

교계도 마찬가지다. 함부로 휘둘러선 안 될 ‘이단 정죄’라는 칼을 마구 휘두를수록, 교단과 연합기관에 대한 혐오만 커질 뿐이다. 더 걱정되는 건, 이러다 한국교회가 아무리 한목소리로 이단이라 외쳐도 세상에서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이미 한국교회가 이단으로 지목한 신천지나 하나님의교회 등을 기독교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기는 세상 언론이나 사람들도 적지 않다. 교단과 연합기관 어른들의 무책임한 행동이 한국교회 다음세대에게 쓰라린 부메랑이 돼 돌아올까 두려운 마음이 드는 건, 나 하나뿐일까.

김나래 종교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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