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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지호일] 새로운 민주주의인가, 디지털 중우정치인가



여기, 여론의 콜로세움에 자유한국당이 소환됐다. “죽이길 원하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이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의 외침이 디지털 공간을 가르자, 이에 호응하는 군중이 무서운 속도로 결집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오른 한국당 해산 청원 참여가 180만 건을 넘어섰다. 이에 질세라 더불어민주당 해산 청원이 시작되더니 특정 정치인 처벌, 청와대 해체, 문재인 대통령 탄핵까지 온갖 청원들이 난립한다.

애초 해결을 바라는 청이 아니니 청원이랄 것도 없다. 정치적 열망 표출, 반대편을 겨냥한 감정 발산, 혹은 쟁점을 뭉개기 위한 ‘물타기’에 더 가깝다. 국민청원 게시판이 국민 논쟁의 장으로 변질한 것이다. 누가 더 센 여론을 만드느냐, 누가 더 많은 대중을 모으느냐 하는 세력 대결장. 여론분석가 김헌태씨는 책 ‘초소통사회 대한민국 키워드’에서 “이제 온라인상에서 특정한 지도자나 정당에 대한 지지층을 만드는 것은 물론 혐오층을 의식적으로 조직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닌 세상이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적 의견을 밝히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자유이자 권리다. 그런데 정치 권력의 정점인 청와대가 제공한 플랫폼에서 여론을 조직화하는 수준까지 나가면 문제가 달라진다. 더군다나 정치적 청원 이슈 상당수는 민주주의의 원리 및 가치와 충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당 해산 청원만 해도 그렇다. 정당의 자유로운 설립과 활동은 대의 민주주의 실현의 전제 조건이다. 그리고 대의 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를 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택한 ‘플랜B’가 아니라 오늘날의 민주주의 그 자체다. 그 근간인 정당을 정치 영역에서 영구 추방하자는 무시무시한 요구는 비민주적 선동이라 할 수 있다. 익명의 청원자가 해산 사유로 댄 ‘정부 입법 발목잡기’ ‘소방예산 삭감’ ‘의원 막말’ 등은 아무리 봐도 정당에 사망 선고를 내려야 하는 요건으로는 턱도 없다.

그런데도 180만명 이상의 동의 행렬을 끌어낸 대목은 어떻게 봐야 할까. 많은 이들이 한국당에 대한 성난 민심, 누적된 불신이 표출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청와대도 청원 조작 의혹이나 북한 개입설 등이 제기되자 발끈하며 반박했다. “이것이 민심”이라는 항변이다.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순수한 국민 여론의 발로라는 말도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우선 국민청원은 익명성에 기반을 두고 있어 누가 어떤 동기로 제안했고, 누가 동참했는지 그 속을 알 수 없다. 또 청원자가 던진 의제에 대해 단순히 찬반 의사를 표할 수 있을 뿐 생산적 토론장은 마련돼 있지 않다. 책임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영역인 것이다.

여기서 디지털 여론장이 교란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이미 이명박·박근혜정부 때 공권력을 동원한 여론 조작·통제가 있었으며, 현 정부 역시 ‘드루킹 사건’에서 보듯 조작의 죄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문재인 팬덤’으로 상징되는 충성스럽고 열성적인 여권 지지층의 양적 공세도 짐작해 볼 수 있다. 한국당이 주장하는 국민청원 조작설에 동의한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보이지 않는 손’ 등에 의한 온라인 여론의 오염 가능성은 상존한다는 뜻이다. 이 여론은 감성적이고 즉흥적인 데다, 변덕스럽기까지 한 특성도 보인다.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나타나는 이상 열기는 청와대가 입법부와 사법부를 압도하는 상황을 반영한다. 문재인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촛불’의 이름으로 직접 민주제 방식을 선호해 왔다.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문패를 내건 청원 게시판 역시 의회나 정당을 뛰어넘어 국민과 직접 말하겠다는 국정 철학을 드러낸다. 관점을 달리하면 여론을 동원한 통치를 끊임없이 꾀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국정 참여는 시민의식 활성화, 행정관료 견제 등에 보탬이 될 수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SNS 등의 결합한 디지털 소통 구조 속에 이미 새로운 양태의 민주주의가 도래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동시에 민주주의와 중우정치 간 경계선이 더욱 흐려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정당정치가 불신당하고, 삼권분립이나 법치주의 같은 민주주의 기본 요소들이 흔들리는 상황을 방치하면 우리가 믿어온 민주주의는 변화하기 전에 먼저 주저앉을 수 있다. 청와대가 디지털 중우정치의 거점이 돼서는 곤란하지 않나.

지호일 정치부 차장 blue5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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