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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윤철호] 민주주의 시대의 시민 노릇



아이스크림이나 TV와 달리 책에는 소비자 정가가 있다. 지금의 엄격한 도서정가제가 도입된 것은 6년 전이다. 할인 경쟁의 부작용에 오프라인 서점이 급격히 사라지고 소규모 출판사들이 경영에 어려움을 겪자 책과 출판의 생태계를 살리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당시 도서정가제가 출판사를 위한 법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이것은 출판인들이 공익을 위해 손해를 무릅쓰고 도입한 정책이었다.

진짜냐고? 그 후 인터넷서점의 할인 경쟁 속에서 높은 매출을 올리던 출판사 중 여러 곳의 매출이 반토막 났다. 독자에게 사랑받는 민음사, 김영사, 열린책들 등등. 뻔한 불이익을 감내한 것이다. 다양한 중소출판사가 약진했고 핫한 독립서점이 탄생했다. 대형·인터넷서점도 영업이익을 대폭 늘리며 신규투자에 나섰다.

나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감사한다. 당시 출판계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도서정가제를 도입하려고 노력한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해마다 6월이면 출판계는 가장 큰 공동행사로 서울국제도서전을 치르는데 박 전 대통령은 바쁜 일정을 쪼개 이 도서전 오픈에도 참석했었다. 박 전 대통령이 책을 많이 읽는 분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도(박 전 대통령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알다시피 박근혜정부 시절에는 블랙리스트 사건도 있었고 출판계도 그 대상이었다).

그러면 출판계와 서점을 소멸시켜가고 있다고 많은 우려를 낳게 했던 6년 전의 구멍숭숭 도서정가제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다. 그 법에 의하면 오프라인서점은 10%까지만 할인할 수 있었던 반면 온라인서점은 무제한 할인이 허용됐다. 도서정가제를 정식 입법한 의미는 컸지만 온라인서점 차별 육성법이라는 말도 들었다. 김 전 대통령은 엄청난 다독가요, 책을 사랑하는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책을 좋아하는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다. 문재인정부는 과연 출판 발전에 긍정적 역할을 하는 정부가 될까? 알 수가 없다. 도종환 장관에 이어 취임한 문화체육관광부 장차관도 책과 출판에 대해 특별한 메시지를 던진 바는 없다.

문재인 정권은 권위주의적 전통에 서 있던 박근혜 정권과는 전혀 다른 전통에 서 있다고 평가된다. 도서정가제 추진은 박 전 대통령의 지시사항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출판·서점인의 간절한 목소리가 먼저 있었다. 민주적 절차를 중시하는 문재인정부는 그런 지시를 잘 내리지 않는 모양이다. 좋은 것 아닌가 싶다. 블랙리스트 같은 것들이 내려가는 일은 줄고 각 분야의 자율적 권한이 늘지 않았을까 싶다. 국민들에게 밀착된, 많은, ‘작은’ 문제들에 있어서 정책방향은 관료들에게 위임된다. 아마도 민주주의 확산의 혜택을 일차로는 행정부가 받고 있는 셈 아닌가 싶다. 게다가 행정조직에 대한 관리감독 책임을 맡고 있는 국회의원들은 일이 많아서 바쁘고 다음 선거에 살아남기 위해서도 바쁘다.

그러나 오랜 관 주도의 성장사회에서 인력, 정보, 자원 분배의 권한에 있어 시민사회에 비대칭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 행정조직은 누가 제어할 것인가? 몇 년에 한 번 바뀌는 정권조차 속절없이 눈치를 봐야 하는 이 공룡을 어떻게 순기능하게 할 것인가는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다가와 있다. 민간인이긴 하지만 정부의 출판정책을 눈여겨보게 되는 출판협회장에게 느껴지는 문제들이다.

한국사회 발전을 위해서도, 문재인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도 그 자체로 철학과 욕망을 갖고 있으면서 정책을 실현해 나가는 공무원의 조직을 향해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각 분야를 얼마나 많이 성장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정권 교체만큼이나 중요해져 있다. 뽑아놨더니 뭐하는 거냐고 대통령을 비난한다고 우리 시민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민주주의 시대의 시민은 바쁘다.

윤철호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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