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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장은수] 서울식물원에서 행복의 비밀을 엿듣다



연휴를 맞아 가족과 서울식물원에 나들이를 다녀왔다. 오랫동안 서울에 식물원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어린 시절 뻔질나게 드나들던 남산식물원을 2006년 10월 ‘남산 제 모습 살리기 사업’으로 철거한 후 서울시가 새롭게 식물원을 마련하지 않은 탓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찾고 싶은 욕망도 일어서지 않는 것일까. 기회 닿을 때마다 전국 곳곳 수목원을 일부러 찾는 열정을 부리면서도 그사이 한 차례도 서울시내 식물원을 찾지 않았다. 부끄러운 일이다.

개원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데다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몰린 탓인지 서울식물원은 활기 넘치면서도 다소 어수선했다. 열대와 지중해성 기후의 식물들은 우리나라 자연이 아니니 온실을 조성해 누릴 수 있게 하고, 다른 기후대 식물들은 바깥 정원에 나누어 심어 사시사철 변모하는 풍경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든 듯했다. 온실 식물은 갖가지 신비로운 생태로 사람들 눈을 끌었으나 정원 식물은 땅에 막 자리 잡은 느낌이었다. 런던 파리 빈 로마 등에서 보았던 화려한 궁정 정원을 기대한 탓일까, 살짝 모자란 기분이었다. 한데 늦은 오후의 쏟아지는 햇살과 함께 군데군데 피어난 꽃들을 즐기며 아내와 산책하는 동안 주변 어르신이 나직이 나누는 말을 몇 차례 들었다. 정신이 화들짝 들었다.

손목같이 가느다란 나무줄기들은 서너 해 후에는 한아름 둥치로 자라 다리를 쉴 자리를 제공할 것이고, 이제 막 통로 기둥에 줄기를 감아올린 장미는 오래지 않아 풍성한 꽃그늘을 이루어 사진을 유혹할 것이다. 실 같은 물고기도 점차 형체를 갖추면서 아이들의 호기심을 부추길 것이고, 외로운 물가 정자도 물소리와 함께 서서히 아늑해질 것이다. 아아, 세상에는 어른들만 아는 비밀이 있다.

식물원은 기계나 시설을 설치 처음부터 완전한 형태로 운영되는 ○○월드나 ○○랜드와는 다르다. 식물원은 본래 생장하는 식물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서서히 모습을 갖추어 간다. 파란 하늘과 어울린 탁 트인 초원을 거닐 수 있는 오늘도 훌륭하지만, 정원이라는 것은 이 나무가 자라고 저 꽃이 만발한 때를 상상할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돈을 넣고 단추만 누르면 상품이 떨어지는 자판기 시스템에 중독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것을, 즉시’ 제공하겠다는 아마존 경제는 인간을 속도강박에 사로잡힌 신경증 환자로 길들인다. 당일 배송 또는 새벽 배송이 촉발한 택배전쟁은 실제로 우리를 얼마나 조급하게 만드는가. 한쪽에서 우리가 더욱더 빠름을 요구하는 순간 다른 쪽에서는 우리 자신이 속도의 희생자로 전락한다. 속도의 쳇바퀴를 돌릴수록 우리는 삶의 여유를 잃어가고, 우리 내면에는 좌절과 분노가 더없이 쌓여간다. 자판기에서 물건이 떨어지지 않을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살펴보라. 절망적 무력감에 사로잡힌 채 주먹으로 자판기를 두드리고 발로 차면서 안절부절못하지 않는가. 속도의 세상에서는 우리 모두가 잠재적 사이코패스가 된다.

그러나 정원에 심은 꽃은 놀이기구가 아니고 나무는 편의시설이 아니다. 향기가 나려면 적절한 때를 맞추어야 하고, 그늘을 맞으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자연은 인간의 속도에 맞추어 움직이지 않는다. 한 주만 빨라도 장미는 피어나지 않고, 한 주만 늦어도 목련은 무참히 져버린다. 온 세상을 ‘자판기’로 상상하는 문명의 질병을 벗어던지지 않는 한, 자연을 제대로 즐기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줄지어 늘어선 묘목에서 숲을 떠올리고, 풀밭 사이사이 놓인 푯말에서 꽃밭을 꺼낸다. 튀밥 같은 웃음을 날리면서 잔디를 달리는 아이들 앞에서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고, 무성한 나뭇가지에서 안식하며 새끼들을 기를 새들의 소리를 듣는다. 똑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시간을 보는 힘’이 있는 사람한테만 정원은 말을 건넨다. 현재로부터 미래를 꺼낼 줄 아는 사람을 지혜롭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다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원사들은 섬세한 손길로 이 넓디넓은 공간에 보이지 않는 질서를 깔아 두었고, 어르신들은 이 질서를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은 풍요로워진다. 행복의 진정한 비밀은 오직 여기에 있음을 어르신들은 우연히 마주친 삶의 후배한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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