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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칼럼] 로스트트랙이 될 패스트트랙



지금의 패스트트랙 사태는 국민이 시급하게 보지 않는데
정권이 제기한 의제란 점에서 2004년 4대 입법 논란과 흡사
4대 입법 논란이 당시 정권에 소득 대신 타격을 안겼듯이
패스트트랙도 궤도를 이탈할 운명적 한계를 안고 있다


러시아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 역사는 사람들을 벌하지 않는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않는 사람들을 벌할 뿐이다. 2004년으로 필름을 돌려보자. 탄핵 역풍에 힘입은 총선 승리의 여세를 몰아 노무현 정권은 국가보안법 폐지 등 4대 입법에 모든 힘을 집중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4대 악법이라 규정하고 치열하게 싸웠다. 2004년 정국은 이 정쟁에 완전히 휘말렸고, 국회는 파행과 몸싸움으로 점철되었다. 연말에 우여곡절 끝에 법안별로 타협안이 마련되어 빅딜이 이루어졌지만, 여당은 국가보안법 개정도 못 하고, 과거사법과 언론법 개정에 만족해야 했다.

이 투쟁에 대해 당시 여권에서도 국정의 핵심 사안도 아닌 운동권 어젠다에 너무 힘을 빼고 민심도 잃었다는 반성의 목소리가 컸다. 사실 한나라당이 ‘차떼기’와 ‘헛발 탄핵’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유력한 대안세력으로 부상하는 데 이 4대법 투쟁은 톡톡히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여권은 지지율이 꺾이고, 내부가 분열됐다. 반면에 보수층은 결집했고, 정권교체 열망 세력의 힘은 커졌다. 이후 지방선거와 대선에서 여당은 참패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과 선거법의 패스트트랙 지정을 둘러싼 지금의 상황을 2004년 상황과 비교하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우선 국민이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의제가 아니라 정권 핵심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의제를 골랐다는 점에서 같다. 다수 국민은 정쟁이라고 생각하는데 정치권은 사활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점도 같다. 다른 점은 2004년에는 우군이 민노당 하나였던 데 비해 지금은 네 정당이 연합해 정당성을 얻으려 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입법의 성격이 분명히 다른 선거법이 끼어 있다는 것이다.

패스트트랙을 강행하는 여권의 정치적 의도는 어림잡아 세 가지 정도로 읽힌다. 첫째, 대통령의 오랜 관심사인 공수처법을 통과시켜 개혁성과를 낸다. 둘째, 정치적으로 자유한국당을 반개혁 극우 정당으로 몰아 고립시킨다. 셋째, 선거법 개정을 통해 진보좌파연합이 지속적 다수 연합이 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을 만든다. 하지만 2004년의 재판이 될 가능성이 큰 이유 역시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국민의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의제들이다. 공수처·패스트트랙, 연동형 비례대표, 검경 수사권 조정 등 말도 어렵지만 민생에 무슨 이익이 되는지 대다수 국민은 잘 알지 못한다. 정치권의 밥그릇 싸움으로 비치고 따라서 여론의 강력한 지지를 받을 수가 없다. 둘째,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바른미래당이 우군으로 남아 있기가 어렵다. 당이 쪼개지든지 아니면 새로운 리더십이 들어서든지 어느 경우에도 4당 연합은 흔들리게 되어 있다. 셋째, 자유한국당을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파와 중도우파 전체에서 그 구심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내치와 외치를 불문하고 국정의 화살들이 과녁을 빗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야당의 강력한 투쟁은 실정에 대한 실망 및 분노와 연계되어 보수층을 결집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사실 공수처 같은 조직은 싱가포르 홍콩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있을 뿐이다. 그것도 기소권은 없는 조직이다. 흔히 거론되는 영국의 국가범죄청은 주로 마약범죄나 조직범죄 등에 주력하는 미국 FBI와 같은 수사기관이지 정치적 부패를 전담하는 기구가 아니다. OECD 국가 중 어느 나라도 하지 않는 기구를 굳이 만들려면 그 타당성과 효율성이 충분히 검증되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지 의문이다. 검찰 개혁의 한 방편이라면 정치권력이 검찰을 휘두를 수 없게 만드는 장치가 더 시급할 것이다. 이 정부야말로 검찰을 정치적으로 가장 잘 활용한 정부 아닌가. 공수처 구성과 운영에서 정치적 편향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 점도 문제다.

선거법은 더 큰 문제다. 월드컵 경기를 앞두고 브라질을 빼놓은 채 유럽 국가들끼리 모여 축구경기의 규칙을 바꾸기로 하면 어떻게 될까. 권위주의 시절에도 야당을 배제하고 선거법을 만든 적은 없었다. 내용의 정당성을 떠나 절차의 정당성에 근본적인 하자를 만드는 것은 그 자체가 민주주의 궤도를 벗어나는 것이다. 패스트트랙은 국회선진화법에서 직권상정을 통해 다수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좁은 출구다. 하지만 이 출구는 적어도 게임의 규칙을 정하는 데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공정성’이라는 허들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논란의 운명은 2004년 4대 입법의 운명과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여권의 의도와 달리 자유한국당은 정치적으로 고립될 것 같지 않고 보수의 결집력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특히 선거법은 패스트트랙에 태운들 통과 가능성도 크지 않다. 무리하게 추진할 경우 국회 공전만 불러 추경이나 시급한 법안들조차 가로막히게 될 것이다. 패스트트랙은 궤도 잃은 로스트트랙이 될 운명을 안고 있다. 2004년의 역사적 경험에서 교훈을 얻는다면 여권이 패스트트랙을 밀어붙일 일은 아니다.

박형준 동아대 교수·전 국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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