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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백 칼럼] ILO 협약 비준은 국가신인도 문제다



정부도 협약 당사자인데 노사 대립이 첨예하다고 소극적으로 임하는 것은 개혁 정부의 자세가 아니다
국제적 위상에 걸맞은 노동기본권 보장 못할 경우 ‘노동권 후진국’ 오명 쓸 수도


정부가 출범한 지 만 2년이 다됐다. 공정과 정의를 내세운 정부가 얼마만큼 노력했는지 공약의 이행 정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지난주 발표한 문재인정부 2년간 국정 운영의 평가 결과는 실망스럽다. 세부 공약 1169개 중 공약 완전이행이 191개(16.3%), 부분이행 654개(55.9%), 후퇴이행 20개(1.7%) 등이었다. 10점 만점에 평균 5.1점을 받았다. 요란하게 한참을 달려온 듯했지만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혁신과 변화에 대한 정부의 추진력에 둔화마저 감지되는 상황이다.

정부의 이런 모습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에서도 나타난다.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는 지난해 7월부터 이를 최우선 논의과제로 삼았다. 하지만 국회에 제출할 합의안을 아직 만들지 못하고 있다. 경사노위 산하 노사관계 제도·관행개선위의 논의는 허송세월이나 다름없었다. 시간에 쫓기면서 공익위원들이 지난 15일 노동계와 경영계의 입장을 절충한 중재안을 제시했다. 이 안마저 노사 모두가 반발해 이견 좁히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노동계는 ILO 협약 취지에 맞게 국제노동기준 준수를 요구하고 있다. 경영계는 노동계 입장을 지나치게 반영해선 안 되고 ‘기업할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은 경제규모가 세계 10위권이고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3만 달러를 넘어섰다. 시대와 상황이 바뀌었는데도 노사정의 입장은 여전히 과거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한국이 비준해야 할 핵심협약은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87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원칙 적용에 관한 협약(98호),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29호), 강제노동 폐지에 관한 협약(105호) 등 4가지다. 87호와 98호는 노동자나 사용자가 단체를 자유롭게 설립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ILO는 실업자, 해직자, 구직자의 노조 조합원 자격을 인정하지 않고, 비조합원의 조합임원 후보 출마를 제한하는 현행 노조법 폐지를 권고한 바 있다.

결사의 자유가 핵심인 ILO 핵심협약은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 노동기본권에 관한 입법사안이어서다. 노동계는 정부가 비준 동의안을 국회에 우선 제출하고 국회가 동의 여부를 결정하는 ‘선 비준-후 입법’을 촉구한다. 경영계는 ILO의 협약 권고와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권고조항이라서 구속력이 없으므로 우리 실정에 따라 수용 여부를 결정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인 자유한국당 김학용 의원은 “핵심협약 비준은 시기상조이며 우리사회가 아직 감내하기가 벅찬 것이 현실”이라면서 장기적 검토 사안임을 주장했다. 경영계 입장과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고용노동부는 논의를 더 진행해 가급적 법을 지켜 처리한다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정부가 비준 동의안을 적극 제출 안 하는 건 비준 의지를 의심케 할 만한 대목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공무원노동조합 관련해 정부는 사용자이고, ILO 협약의 당사자다. 민간 노사문제를 논의하듯 나서지 않는 건 개혁 정부의 모습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ILO 결사의 자유 원칙은 자유무역 국가들의 기본 규범이다. 세계화와 자유무역의 공정성이 지켜지기 위해선 노동기본권 준수가 필요하다는 데 EU를 중심으로 공감대가 형성됐다. 한국도 1996년 김영삼정부 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조건으로 이를 약속했다. 2006년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으로 출마하면서도 공약했고 이어 2010년 박근혜정부 땐 한·EU FTA를 체결하며 8개 핵심협약 비준에 노력하겠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대선공약은 물론 ILO 100주년에 맞춰 핵심협약의 비준을 여러 차례 밝혔다. 한국은 1991년 12월 ILO 가입 이후 30년 가까이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 이제 한국은 ILO와 OECD 회원국으로서 세계적 흐름에 맞춰 책임을 다해야 할 때다. 정부가 비준에 시간을 끌어 EU의 무역 압박을 초래한 건 적절치 못했다. EU는 지난해 말 한·EU FTA 권고조항 미이행을 내세워 한국정부를 상대로 무역분쟁 절차를 개시했다. 마지막 단계인 전문가 패널 소집을 앞두고 있다. 정치적 판단이 작용하겠지만 전문가 패널이 소집되면 한국은 국제적으로 ‘노동권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 있다. 올해 창립 100주년인 ILO는 오는 6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특별 총회 등을 개최할 예정이다. 문 대통령은 기조연설자로 공식 초청된 상태다. 협약 비준이 시간에 쫓기는 한 이유이기도 하다.

ILO 핵심협약 비준은 노사관계를 보다 공정하고 대등하게 바꿔나가고, 국가 위상에 걸맞게 최소한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려는 것이다. 대립적 노사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글로벌 수준의 노동권 보장에서 후퇴할 경우 경제 혁신과 노동구조 개혁은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노동 존중’을 외치는 정부가 비준에 소극적인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김용백 논설위원 yb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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