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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이승우] 개에 물린 기억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개와 고양이를 비롯해 모든 동물을 무서워한다. 싫어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싫어하려면 대상에 대한 평가와 판단의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런 걸 가질 수 없다. 싫어할 능력이 그녀에게는 없다. 두려움은 싫어함을 선택할 권리를 그녀에게서 빼앗는다. 그녀는 개나 고양이가 나타나면 얼어붙는다. 개나 고양이의 털이 스치기만 해도 기겁한다. 싫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이다.

누군가 집으로 초대를 하면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지부터 묻는다. 그런 집에는 가지 않지만, 불가피하게 가야 할 때는 개나 고양이를 보이지 않는 곳에 가둬 둘 것을 부탁한다. 동물과 함께 하는 삶은 그녀에게는 없다. 유별나기도, 딱하기도 하다. 개와 고양이를 가족처럼 여기며 키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면, 그 어쩔 수 없음이 딱하다.

어릴 때 개에게 물린 기억이 동물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의 원인이라고 했다. 어떤 경험은 사람의 삶을 통째로 지배한다. 그런 경험이 있다. 어떤 경험은 경험한 사람의 삶에 아주 작은 영향만 주지만 어떤 경험은 아주 크게 영향을 미친다. 어떤 일은 쉬 잊히지만 어떤 일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 어떤 상처는 시간이 낫게 하지만 어떤 상처는 시간이 가도 낫지 않거나 시간이 갈수록 심해진다. 어떤 기억은 영혼 깊은 곳에 새겨져 유전자의 일부가 된다. 타고난 성품과 같이 좀처럼 바꾸기 힘든 것이 된다.

인간의 기억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은 첫 경험이라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모든 첫 경험들은 대문자의 경험이다. 대문자의 경험은 다른 경험들에 비해 잘 잊히지 않을 뿐 아니라 이후의 유사한 경험들에 길잡이 노릇을 한다. 좋은 경험은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하지만 나쁜 경험은 나쁜 길잡이 역할을 한다. 가령 나쁜 연애 경험을 한 사람이 모든 연애를 거부하는 일은 드물지 않고, 이상하지 않다. 한 번의 연애에서 연애가 안전하지 않다는 교훈을 받은 사람은 두 번째 연애의 기회를 피하게 되고 모든 연애를 거부할 수 있다. 개에 대한 나쁜 기억 때문에 모든 동물을 무서워하게 된 나의 지인처럼 모든 이성을 두려워하고 모든 이성의 호의를 왜곡하고 부정할 수 있다. 설령 나중에 누군가를 사귄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하고 있는 연애가 안전한지 그렇지 않은지 강박적으로 집착하게 된다면, 그 사람이 ‘연애의 맛’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무슨 건축이나 부동산 투자도 아닌데, 안전성 여부가 연애의 본질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질을 가리고 진실을 외면하게 하는 것이 나쁜 대문자의 경험으로부터 받게 되는 가장 큰 부작용이다. 개에 대한 나쁜 기억이 개와 동물에게 가는 길을 막는다. 동물과 가까워질 수 없고 당연히 동물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그저 무서운 존재일 뿐이다. 동물이 무섭다는 것은 동물에 대한 정의일 수 없다. 연애에 대한 나쁜 기억이 연애로 가는 문을 막는다. 연애의 기회를 가질 수 없고 당연히 연애의 정수를 알 수 없다. 연애는 그저 안전하지 않을 뿐이다. 연애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은 연애에 대한 왜곡이다.

나쁜 종교적 경험은 그 종교의 모든 것, 더 나아가 모든 종교를 부정하게 만든다. 그 종교 안에 담긴 진리를 들여다볼 여지를 주지 않고 그 종교가 지시하는 참 가치와 만날 기회를 차단한다. 가령 어떤 종교, 혹은 종교인들은 본질과는 별로 관계있다고 할 수 없는 지엽말단의 사안에 대해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집착하고 심지어 정죄까지 함으로써 그 종교의 참 가치를 오해하게 한다. 하늘과 영원을 이야기하면서 마치 이 세상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행동하는 어떤 종교지도자들의 세속적 행보와 언행불일치는 그 종교 안에 내재된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무엇인가를 대표한다. 무엇인가를 대표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나는 남자이며 대한민국 사람이며 소설가이고 기독교인이다. 또 누군가의 아들이며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누군가의 친구이고 누군가의 선생이다. 나는 의도하든 하지 않든 누군가에게 어떤 경험을 하게 한다. 곧 잊힐 사소한 경험일 수도 있지만 잊히지 않을 대문자의 경험일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경험주의자들이다. 나는 누군가를 내가 대표하는 세계의 안쪽으로 인도할 수 있지만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등골이 오스스해지면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승우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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