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칼럼  >  기타

[청사초롱-최연하] 걷고 사랑하고 예술하라



요 며칠 사이 꽃들이 한꺼번에 피었다. 무조건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봄은 온전히 무료이기에, 운동화를 신고 나가기만 하면 된다. 막 피어나기 시작한 라일락 봉우리에 볼을 대 향을 묻히고, 층층이 다채로운 초록을 마주하며 한껏 심호흡을 한다. 해 질 녘 어느 집 부엌에서 들려오는 도마질 소리에 맞춰 보폭을 조정하다 보면 딱새도 입맛을 다신다. 걸음이 주로 나를 데려가는 곳은 마을의 공간과 사물에 몰두해야 하는 지점, 풍경, 소리, 움직임, 사람들, 바람, 감촉 등의 특수한 실체다. 그것들은 아직 현상되지 않은 오래된 필름을 태운 빛줄기처럼 희미하게 맺혀 있기도 하지만, 깨진 유리거울처럼 날카롭게 풍경을 내뿜기도 한다. 걸으면서 읽어야 할 마을의 숨은 텍스트들, 쓰이지 않은 행간을 더듬으며 기꺼이 헤매는 시간도 누리게 된다. ‘걷기’란 참으로 신묘한 일이다. 땅에 콕콕 발을 심으며, 이동하며, 하늘과 대지의 메신저가 바로 ‘나’라는 생각으로 충일해진다. 감각의 근육이 다져지고, 창을 통해 내다봤던 시야가 확장되며 눈이 밝아진다. 이력(履歷)의 한자어 ‘이(履)’에 ‘밟다, 신다, 행하다’라는 뜻이 있다. ‘신발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 곧 이력서인 셈인데, 어느 이력서에 삶의 매체(media)가 ‘걷기’라고 쓰며 뿌듯해한 기억이 새롭다. ‘나는 걷는다. 고로 생각한다.’

정해진 노선 없이 걷다 보면 길은 매 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길 위에서의 시각도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길을 따라 계속 움직인다. 사랑하는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아니 고백하자마자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우발적이고 우연적이고 내 의도로부터 자유롭게 전개되는 산책길은 사랑의 길에 다름 아니다. 오랜 걷기가 만들어준 감각의 근력은 멀리서 오는 사랑을 알아채 꼭 붙잡을 때도 있다.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듣지 못했던 작은 소리들이 음악처럼 울리며 세포를 깨우며 온다. 감각의 지층이 뒤엉키기에 일상이 와해하거나 시간이 재편되며, 프루스트처럼 기억이 무의지적으로 한꺼번에 솟아난다. 주체가 ‘주체 없이 흔들리며’, ‘상대방 되기’가 사랑이고, 사랑하는 순간 감각이 충일해져 고통과 희열을 받는 표면적이 넓어지니 그동안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던 존재의 출현이 사랑인 것이다. ‘사랑해… 사랑해…’라고, 동어 반복적으로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언어의 한계는 특이한 율동으로, 닮고자 하는 욕망으로, 새로운 사이클과 리듬에 반응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과정에 동참하게 하는 색다른 감수성을 갖게 한다. ‘나는 걷는다. 고로 사랑한다.’

그런데 사랑의 힘은 상상력에 다름 아니었다. 예술의 기원에 사랑하는 사람을 간직하고자 그의 그림자를 그린 디부타데의 일화가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도 예술의 탄생에 사랑의 힘이 필연적으로 내재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오직 하나인 내가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이 작품으로 탄생하는 전 과정에 동참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다만 이미지로 떠돌 뿐인 것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빚어지거나,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들이 가시화되고,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작하는 예술 행위는 사랑의 또 다른 형태인 것이다. 누구나 사랑에 빠지고, 그러니 모두가 예술가인 셈이다. 예술창작은 그저 반복적으로 걷는 길 위에서 우연히 사랑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해 ‘내 사랑’을 보존하고 자랑하고자 하는 전일한 마음의 과정이다. 고유한 내가 만들어낸 것이기에 특이할 것이고, 내게만 더욱 선명하기에 자율적이며, 무용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예술 하기’다.

하나의 작품을 보는 일은, 그 작품을 탄생시킨 육체와 생애의 시간을 통째로 맞이하는 일이다. 그(녀)가 걸었던 길을 따라가며 삶의 스산함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공유하고, 함께 가던 길을 멈추고 주위를 배회하며 풍경의 세목을 들여다보는 일. 봄이 빠르게 달아난다. 온전히 무료인 봄을 맘껏 거닐고 사랑하다 보면 내 안의 수호신, ‘예술’이 탄생하지 않을까.

최연하(사진평론가)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