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칼럼  >  기타

[뉴스룸에서-권기석] 소득주도성장 말고 세대교체성장



지난 2월 학술지 ‘한국사회학’에 실린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의 논문(세대, 계급, 위계-386세대의 집권과 불평등의 확대)은 한국 사회 불평등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이 교수는 불평등을 86세대의 권력·자원 독점과 연결시킨다. 그 어떤 세대보다 더 많은 수혜를 입은 86세대가 기득권을 더 오래 점유함으로써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 교수의 글을 보면 86세대의 권력·자원 독점은 ‘행운’이 따른 결과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86세대는 30대 초반~40대 초반이었다. 위 세대는 구조조정을 당했고 아래 세대는 한동안 정규직으로 입사하지 않았다. 아래 위가 잘려나간 조직에서 86세대는 홀로 남아 거대한 블록을 구축했다. 86세대는 2000년대 초반의 벤처 붐, 2000년대 중반의 집값 폭등으로 자산과 자본까지 갖게 됐다. 86세대 다수는 비정규직 차별을 피했다. ‘신분적 위계화’가 진행되기 전 일찌감치 정규직으로 노동시장에 진입한 덕택이다. 시간이 지나면 급여가 오르는 연공제가 유지된 덕에 86세대는 화이트칼라든 블루칼라든 임금 상승의 수혜를 톡톡히 누렸다.

통계는 86세대가 다른 세대보다 더 오랫동안 한국사회 상층부에 머물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교수가 20년간 국내 100대 기업 임원의 연령대별 비율을 분석해보니 1960~64년생은 2010년대 초·중반 40%를 돌파한 뒤 2010년대 후반에도 수위(37%)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정치권의 86세대 장기 독점도 통계로 보면 더 뚜렷하다.

이 세대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정규직으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탓에 비정규직과 청년은 권력과 자원에의 접근이 어려워졌다. 이 교수는 “386세대를 필두로, 40대 후반~60대 초반의 상층 연장자 그룹이 쌓아놓은 신분화된 기득권 성벽 아래에 그들의 자식들이 스펙 경쟁을 하며 필사적으로 기어오르고 있는 형국”이라고 말한다.

특정 세대를 겨냥해 공개적으로 ‘불평등이 당신들 탓’이라고 하는 건 금기일지도 모른다. 세대 간 갈등을 일으킨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어서다. 현재 권력 집단에 대한 아래 세대의 지적은 불경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러 노력에도 불평등이 개선은커녕 악화되고 있으므로 가능한 모든 원인에 문제를 제기해봐야 한다. 적어도 국회의원과 공무원, 대기업·공기업·금융기관의 임원, 거대 노동조합의 간부 등 각 조직의 86세대 리더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시대의 행운을 얻는 사이 나머지는 불평등해졌다”고.

문재인정부는 불평등 완화를 위해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을 기치로 내걸고 있다. 전자는 소득분배를 강화하고 후자는 이를 위한 파이를 늘리겠다는 것이다. 86세대의 기득권 독점이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면 더 빠르고 확실한 불평등 완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바로 86세대 리더들이 장기간 점유하고 있는 권력과 자원을 아래 세대와 나누는 것이다. 현 정부 방식대로 이름을 붙이자면 ‘세대교체성장’이 된다.

세대교체성장을 하자고 해서 86세대 리더들이 당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권력과 자원이 자연스럽게 아래 세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건 연공제의 폐기와 직무급제의 도입이다. 30대라도 업무 성과가 좋으면 중요한 직책을 맡아 50대보다 더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정규직, 비정규직에 상관없이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받도록 하는 일도 서둘러야 한다. 상당수가 20, 30대인 비정규직의 보상이 늘어날 수 있도록 말이다. 3선, 4선의 86세대가 수두룩한 정치권은 당분간 총선 공천에서 연령대별 할당제를 해서라도 세대교체를 이뤄야 한다. 이 모든 일은 86세대의 국회의원, 공무원, 기업 임원, 노조 간부의 손에 달려 있다. 행운은 그동안으로 충분했으니 이제 ‘책임감’을 보여줄 때다.

권기석 사회부 차장 keys@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