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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정건희] 동업자 정신



지난 17일 부산 사직구장. 기아 투수 고영창이 던진 공이 롯데 타자 나종덕의 팔뚝을 강타했다. 한참을 일어나지 못하던 나종덕에게 고영창은 모자를 벗고 두 차례나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아홉 살 차이 나는 선배가 보여준 진심어린 사과에 나종덕은 언론을 통해 “당황했다”면서도 고마움을 내비쳤다.

그라운드는 전쟁터다. 메이저리그(MLB) 선수들은 공에 맞거나 부상을 당해도 아픈 티를 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사과 대신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응수가 다반사다. 1998년 KBO리그에 외국인 선수가 도입되고, 코리안 메이저리거들의 활약으로 MLB 중계가 일반화된 이래 각종 MLB 스타일과 불문율은 일종의 ‘선진 문물’로 수용돼 왔다. 국내 야구계의 엄격한 선후배·서열 문화에 대한 반발로 MLB식 투쟁심을 장려하기도 했다. 다만 몸에 맞는 공이나 부상이 우려되는 플레이와 관련해선 사과를 건네는 우리 방식이 더 낫다는 공감대가 자리를 잡은 분위기다. 최근엔 MLB 중계에서도 몸에 맞는 볼을 던진 투수가 사과하는 모습이 종종 화면에 잡힌다.

같은 날 시카고 개런티드레이트필드. 홈팀 화이트삭스 유격수 팀 앤더슨은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경기에서 4회 홈런을 치고 배트를 덕아웃 쪽으로 던지며 포효했다. 6회 다시 타석에 들어선 앤더슨의 엉덩이에 투수 브래드 켈러가 빠른 공을 꽂아 넣었다. 벤치클리어링이 벌어졌고 양 선수와 감독, 코치 등 여럿이 퇴장조치를 당했다.

방망이를 멋들어지게 던지는 배트 플립, 이른바 ‘빠던’은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세리머니지만 MLB에서는 금기시돼 왔다. 상대팀을 자극하는 행위를 최대한 자제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흥미로운 건 앤더슨의 배트 플립을 둘러싼 찬반 양론과 리그 사무국의 반응이다. 팬들의 설왕설래가 이어지자 MLB 공식 트위터는 “계속 하라(Keep doing your thing)”며 앤더슨에 지지를 표했다. 신시내티 레즈 투수 아미르 가렛 역시 트위터에 “왜 배트 플립 때문에 화를 내는가? 감정이 상해서?”라고 반문하며 “다음에 삼진으로 되갚으면 된다. 투수와 타자 모두 주먹을 불끈 쥐든, 문워크를 추든, 뭐든 찬성”이라고 거들었다.

미국 야후스포츠는 최근 “포브스의 연례 평가에서 미국프로농구(NBA)의 구단 가치가 처음으로 MLB를 뛰어넘었다”고 전했다. 농구나 축구의 빠른 경기 진행, 화려한 개인기와 세리머니 등이 젊은 스포츠팬들에게 어필하면서 야구를 상대적으로 지루하게 느낀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MLB와 선수노조도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100년 넘게 자리 잡은 엄격한 불문율을 벗어나 배트 플립과 같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 또한 거론되는 타개책 중 하나다.

종주국까지 전파된 KBO 스타일을 자랑스러워하자는 게 아니다. 단지 ‘동업자 정신’에 관한 이야기다. 문화도 불문율도 다르지만 이들 모두 프로야구라는 거대한 비즈니스 생태계에 발 딛고 있다. 시대와 여론 변화에 발맞춰 생존을 고민한다. 궁극적으론 자신들의 존립 기반이자 가장 큰 동업자인 ‘팬’들로부터 외면받지 않으려는 몸부림에 가깝다.

노사 갈등에 시름하는 국내 자동차업계로부터 여론이 등을 돌리고 있다. 수출량은 매년 감소하는데 내수시장에선 외제차가 매년 10%대 판매 성장을 기록하며 약진한다. 한국GM 군산공장 생산 중단, 르노삼성차 파업 장기화 등의 여파로 협력업체와 지역경제 불안감도 가중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르노삼성차 노조 조합원의 파업 참가율은 51%로, 6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돌이켜보면 민주화운동을 거쳐 문민정부 수립 이후 2000년대 들어 노동운동과 노조를 바라보는 여론은 대개 온정적이었다. 노동 착취 위에 산업화 시대 고도성장을 꽃 피웠다는 부채의식, ‘을’의 눈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시대정신이 있었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과 함께 고용의 종말을 논하고 양극화 극복과 포용적 성장을 함께 고민하는 지금, 더 이상 을로 칭하기 민망해진 강성 노조를 향한 시선은 싸늘해져만 간다. 관성적 투쟁이 산업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팬이 있어야 선수도 있다’는 상식은 비단 스포츠에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 노사뿐 아니라 세금과 구매로 산업 생태계를 뒷받침하는 국민들도 동업자다.

정건희 산업부 기자 moderat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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