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최주혜] 무의식에 숨은 그것



동네 중학교 앞을 지나다 신기한 광경을 보았다. 학생들이 피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처음 보는 공을 들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색이 입혀진 공은 축구공보다 세 배쯤 커 보였다.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자 한 여학생이 두어 걸음 물러났다 돌진하며 힘껏 공을 던졌다. ‘맞으면 엄청 아프겠다’고 생각이 든 순간 공이 슬로모션 처리라도 한 듯 느릿느릿 날아갔다. 알고 보니 ‘빅 발리볼’ 경기에 사용되는 공으로 가볍고 부드러워 체육 수업에 두루 쓰인다고 했다. 나는 무등산수박만 한 공이 하늘을 떠다니는(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모양이 신기해 운동장 그물 담에 바싹 다가섰다.

학창 시절, 피구는 공포 그 자체였다. 자신만만한 친구들이 던지는 공은 공이라기보다는 폭탄에 가까웠다. 체육시간에 피구를 한다는 소문이 돌면 빠질 구실을 찾느라 골머리를 앓곤 했다. 그럼에도 별 수 없이 끌려나가면 빨리 아웃되어 외야로 빠지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다짐은 피해야 한다는 본능에 졌고 아웃되기는커녕 번번이 홀로 남는 상황이 벌어졌다. 심장은 널뛰고 머리는 정지된 채 어서 이 순간이 지나가길 바랐던 기억이 난다.

한창 옛 생각에 빠져 있는데 학생이 놓친 공이 내가 선 쪽으로 튕겨왔다. 기억 속의 폭탄에 비하면 꽤 만만해보였다. 그런데 웬걸? 공이 가까워질수록 마음 깊은 곳에서 그것이 불쑥 튀어나왔다. 나도 모르게 목이 움츠러들면서 몸이 뻣뻣해졌다. 어딘지도 모를 곳에 숨어 있다 슬며시 고개를 내민 그것, 공에 대한 두려움은 순식간에 나를 삼십 년 전으로 되돌려 놓았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을 빙산에 빗대어 말했다. 빙산의 대부분이 수면 아래 가려져 있듯 마음의 많은 부분도 의식하지 못하는 영역인 ‘무의식’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 그곳에는 얼마나 많은 감정들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을까. 또 어떤 감정이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 할까. 이 참에 수면 아래 숨어 있을 그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봐야겠다. 하나씩 꺼내봐야겠다. 혹시 모른다. 봄 햇살 아래 늘어놓으면 잘 마른 빨래처럼 가벼워질지도.

최주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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