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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원재훈] 詩가 필요한 순간



발등에 불 떨어진 것 같은 일상을 살고 있지만 가끔은 한가하다고나 할까, 조용히 자연을 응시하는 시간이 다가오기도 한다. 일요일 오후, 편의점 커피라도 한 잔 사올까 하는데 평소에 존경하던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일이 있어 자네 집 근처에 있으니 카페로 올 수 있으면 오라는 연락. 면도를 할까 하다가 그대로 카페로 가서 커피 한 잔을 시키고, 산자락 아래에 있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헤밍웨이의 턱수염과 슈베르트의 피아노 트리오나 괴테의 책 이야기를 나누고 음악을 들었다. 그러자 창밖의 풍경이 조금 달라 보인다.

개나리 진달래가 벚꽃과 함께 피어 있는 풍경의 밑바닥에 풀꽃들이 피어 흔들리고 있었다. 변덕스러운 봄바람이 꽤 사납게 불고 있는데, 키 작은 풀꽃들은 바람에 흔들리면서 쓰러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문득, 김수영 시인의 ‘풀’이라는 시를 떠올리게 한다. 풀들이 바람에 따귀를 맞고 바르르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풀이 바람에 눕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걸 묘사하는 시를 그제서야 조금 이해를 했다고나 할까. 하여간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시를 그때가 되어서야 진짜 만났다, 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것은 온전히 나만이 아는 그런 세상이었다. 그러자 소월의 ‘저만치 홀로 피어 있는 꽃’까지 연상되면서 일요일 오후는 오랜만에 참으로 풍요로웠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속된 말로 살기 싫었었는데. 내일부턴 뭐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아주 가끔은 세상사와 조금 떨어져 선생과 한담을 나누면서, 혹은 홀로 자연을 바라보는 시간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역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사일구혁명 기념일이 가까워지고 있다. 사일구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시인은 김수영이다. 김수영의 시는 사일구를 기점으로 변화하고 발전한다. 그가 바라본 세상에 대한 시는 우리 문학사의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풀’과 함께 ‘현대식 교량’이라는 시를 즐긴다. 앞부분만 조금 읽어 본다.

‘현대식 교량을 건널 때마다 나는 갑자기 회고주의자가 된다/ 이것이 얼마나 죄가 많은 다리인 줄 모르고/ 식민지의 곤충들이 24시간을/ 자기의 다리처럼 건너다닌다/ 나이 어린 사람들은 어째서 이 다리가 부자연스러운지를 모른다/ 그러니까 이 다리를 건널 때마다/ 나는 나의 심장을 기계처럼 중지시킨다/ (이런 연습을 나는 무수히 해왔다).’

항일 저항기와 해방, 분단과 전쟁 등 굴곡진 현대사는 현대식 교량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사일구혁명이라는 다리는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으로 연결시킨 역사의 교량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인의 말대로 죄 많은 다리이다. 왜 그런지는 곰곰이 생각해 보자. 몇 줄의 문장으로 알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아니 어쩌면 영원성을 획득한 것 같은 우리 사회의 뉴스들. 반민특위 문제에서부터 이데올로기의 문제들, 이를 기반으로 한 이쪽과 저쪽의 정말 지긋지긋하게 소모적인 정치적인 논쟁들. 진보와 보수 등등. 다른 쪽에선 미투와 마약 사건들이 사나운 바람처럼, 때론 쓰나미처럼 불어온다. 그때마다 풀들은 눕고 우리는 현대식 교량을 건너고 있다. 살아야 하니까 거기로 가야 하니까. 이 시의 마지막 연 ‘정말 희한한 일이다. 나는 이제 적을 형제로 만드는 실증(實證)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회고주의가 아니더라도, 다리를 건너는 동안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게 한다. 나는 이제 김수영 시인처럼 적을 형제로 만드는 실증을 보고 싶다. 적을 형제로 만드는 일은 정말 지난할 것이다. 젊음과 늙음이, 과거와 현재가 교차해야 하고, 증오와 사랑이 쌍곡선을 그어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시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이번 주는 김수영의 시 몇 편을 노트에 옮겨 적으면서 천천히 보내고, 그것을 따라 읽으면서 심장의 박동수를 원활하게 할 것이다.

원재훈(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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