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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윤철호] 우리는 왜 한목소리를 내나



우리나라 출판산업의 특징 중 하나는 산업의 크기가 작지 않은데도 개별 출판사들의 크기는 작다는 것이다.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개발도상국의 많은 나라들에서 보이는 것처럼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큰 출판사들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중국처럼 문학이나 교육 같은 분야별로 묶은 거대 출판사나 성 단위로 묶은 대형 출판사도 없다. 심지어 영국, 프랑스, 독일 같은 나라들도 대표적인 큰 출판사 몇 개의 매출이 전체 산업의 절반을 넘는 경우가 많다.

대한출판문화협회장으로 외국의 대형 출판사 대표들을 자주 만나는데 그들이 대표하는 출판사의 규모가 내가 몸담고 있는 출판사의 100배가 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한 나라를 대표해서 만나기 때문에 꿀릴 것은 전혀 없다. 우리나라 전체 출판산업의 규모는 위에서 언급한 나라들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한 나라의 출판 규모에 따라 내는 국제출판협회 회비도 그가 속한 나라보다 많이 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대형 출판사가 없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볼 때가 있다.

처음에는 우리나라에 대형 출판사가 없는 이유를 우리나라 출판인들의 개성 정도로 생각했다. 시스템 속에서 일하기보다 스스로 내고 싶은 책을 골라서 정성껏 만드는 장인정신이 우리 출판인들의 혈관 속을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대학 출판부에서나 겨우 낼 수 있는 두꺼운 학술서도, 미술관에서나 낼 법한 사진집이나 예술책도 작은 출판사들이 겁 없이 만든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출판의 다양성을 이 작은 출판사들이 책임지고 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하지만 조금 더 곰곰이 생각을 해 보면 이렇게 개성 있고 아이디어도 많은 출판사 가운데 하나도 큰 규모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은 또 이상한 일이다.

우리나라가 분단과 개발독재시대를 오래 거치면서 체질적으로 정부와 가까울 수 없는 자유로운 영혼들은 성장의 기회를 박탈당하지는 않았을까. 실제로 좌우파를 막론하고 오랜 독재의 상흔을 안고 있는 나라들은 출판이 국가의 소유이거나 민간에 있다면 거대 자본을 형성할 정도로 성장하기 어렵다. 출판의 자유는 늘 독재를 위협했고 그래서 개성 있고 생각이 깊은 출판사들은 물리적 폭력이나 교묘한 방해 앞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출판사들이 스스로 성장의 동력을 갖게 된 것이 민주화 이후이니,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큰 규모의 출판 자본이 성장할 시간이 짧았다.

하지만 작고 다양한 출판사들이 많이 모여 거대한 생태계를 이룬 우리나라 출판산업의 미래가 거대 출판사들이 존재하는 다른 나라 출판산업보다 암울한 상황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작은 출판사들이 가지고 있는 개성들을 네트워크로 묶고 정책적으로 지원할 수만 있다면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빠른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면서 창의적인 콘텐츠를 생산하는 데 훨씬 유리한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출판사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유통 선진화나 저작권과 관련된 법안 정비 같은 일들에 대해 의견을 모아 해결할 수 있다면 오히려 빠른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이 2700여개라는 세계에 유례 없는 숫자의 회원사를 가지고 있는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유통, 저작권, 독서진흥, 국제교류 등 작은 규모로 하기 어려운 일들을 모여서 함께 하는 이유다. 출판계의 뜻을 모아 정부와 독자들을 잇는 역할을 열심히 하고 있다. 그 틀 안에서 다양한 생각들이 출판을 통해 표현되고 자라난다고 믿는다. 두 달여 앞으로 다가 온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리면 구석구석에서 다양한 형태로 출판을 하고 있는 동료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것이다. 역사적 배경, 경제적 조건과 정치적 상황이 모두 다른데도 우리가 이룬 모든 것을 책에 담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미래세대에 전하려는 그들의 의지를 느끼면 마음이 뜨거워진다. 그 뜨거움이 더 많은 사람이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도록 격려한다.

윤철호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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