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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천지우] 닥치고 팩트풀니스



SNS를 보노라면 지리멸렬한 정권 때문에 나라가 망해간다는 탄식이 이슈마다 나오는가 하면, 정권이 아무리 헛발질을 해대도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매번 감싸고 옹호하는 쪽도 있다. 신문도 마찬가지다. 어떤 신문을 보면 이 나라는 이미 망했다. 경제 외교 안보 모두 진즉에 파탄 났다. 그런데 다른 신문에는 이렇게 망했다는, 혹은 망해가고 있다는 얘기가 없다. 뭐가 맞는 걸까.

지금은 뭐가 진짜로 옳은지는 중요하지 않은 시대인 것 같다. 각자가 진실이나 정의라고 여기는 것을 말뚝처럼 박아놓고 이를 강화해주는 정보만을 붙여갈 뿐이다. 거대한 편견의 성채다. 업데이트 안 된 지식, 빈약한 식견으로 모든 사안을 단정해버린다. 지식은 일신해야 하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내 생각도 계속 바로잡아 가야 하는데, 다들 그러지 못하고 있다.

여기 이 시대 모든 한국인이 반드시 읽어야 할 생명수 같은 책이 있다. 스웨덴 출신 의사 겸 통계학자 한스 로슬링이 아들 올라, 며느리 안나와 함께 쓴 ‘팩트풀니스(Factfulness)’다. 책상물림이 아니라 오지에서 질병 퇴치에 힘썼던 공중보건의의 글이어서 신뢰가 간다. 제목 그대로 ‘사실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는 책이다. 세상에 대해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들을 지적하고,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을 가질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이를테면 많은 이들이 전 세계의 20%만 잘살고 나머지 80%는 가난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니다. 소득수준을 4단계로 나누면 극빈층인 1단계는 세계 인구 70억 중 10억명이 채 안 된다. 그런대로 사는 수준인 2단계와 3단계에 각각 30억, 20억명이 속한다. 고소득층인 4단계는 한국을 포함해 10억명이다. 좋은 소식은 잘 보도되지 않고 온갖 좋지 않은 뉴스만 부각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세계가 점점 나빠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로슬링은 많은 통계를 들어 세상이 생각보다 훨씬 괜찮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직 나쁜 면도 있지만 분명히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정보로 대중의 공포를 자극하는 일도 자주 벌어진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6월 고리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2011년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방사능 영향으로 인한 사망자나 암환자 발생 수는 파악조차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한 방사능 때문에 사망했다고 보고된 사람은 로슬링이 이 책을 쓴 2017년 초까지 없었다. 사고 수습 현장에 투입됐던 피폭 근로자 1명이 폐암으로 숨진 사실을 지난해 9월 일본 정부가 처음 확인했을 뿐이다. 원전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게 숭고한 정책 목표라 하더라도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된다.

모든 문제에 대해 원인과 해결책을 단순하게만 생각하는 것, 어떤 일이 잘못됐을 때 특정 개인이나 집단만 콕 집어서 비난하는 행태도 옳지 않다. 로슬링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해법은 없다”며 복잡함을 끌어안으라고 했다. 또 “(문제의 책임을 물어 비난할) 나쁜 사람을 찾아내면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거의 항상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며 여러 원인이 얽힌 시스템을 이해하는 데 힘을 쏟으라고 주문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겸손이다. “겸손이란, 본능으로 사실을 올바르게 파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것이고, ‘모른다’고 말하는 걸 꺼리지 않는 것이자,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을 때 기존 의견을 기꺼이 바꾸는 것이다. 겸손하면 항상 내 견해를 옹호할 준비를 해야 할 필요가 없어 마음이 편하다.” 로슬링은 “정글 칼을 든 성난 한 무리 남자들에게 도륙당할 뻔한 나를 이성적 언쟁으로 구해준 이름 모를 용감한 맨발의 여성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했다. 그가 신종 유행병을 조사하러 콩고민주공화국의 한 마을을 찾아 혈액 샘플을 얻으려 했을 때 수십 명이 “우리를 속여 피를 훔치려 한다”며 칼을 휘둘렀다. 이때 쉰 살쯤 돼 보이는 여성이 앞으로 나와 놀랍도록 힘 있고 논리적인 연설로 좌중을 진정시켰다. 비(非)이성의 상태로 광분하는 무리는 지금 한국에도 많다. 이 맨발의 여성이 보여준 지혜가 필요하다.

천지우 정치부 차장 mog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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