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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박상익] 근대적 개인의 필요성



존 밀턴(1608~1674)은 ‘실낙원’을 쓴 영국 시인이지만, 시인이기에 앞서 역사상 최초로 언론자유사상을 설파한 사상가다. 그의 ‘아레오파기티카’가 언론자유의 경전으로 불리는 이유다. 하지만 ‘아레오파기티카’가 종교개혁문서이기도 하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밀턴은 종교개혁가이기도 했다. 그는 목사의 권위에 맹종하는 어린아이 같은 신자가 아닌, ‘개인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성숙한 인격, 즉 ‘근대적 개인’을 종교개혁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그의 입장은 ‘인식론적 개인주의’로 요약된다.

밀턴의 검열제 폐지 주장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당시 영국에서는 성직자들이 검열관 직책을 도맡다시피 했다. 밀턴은 성직자가 평신도를 어린아이 취급하며 감시하는 상황을 참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선 독립적 인격체가 감시를 받는 상황에 극심한 모멸감을 느낀다. 국민을 철부지 아이 취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본령에서 한참 벗어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사의 회초리를 벗어났으면서도 출판허가증을 얻어야 출판할 수 있다면, 다 자란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학동(學童)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신뢰를 얻지 못한 채 의심 받으면서 성숙한 인격으로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틀림없이 마치 보호자와 함께 있는 어린아이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것은 실로 저자와 책에 대한, 그리고 학문의 위엄에 대한 치욕이요 망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과 분별력이 형편없는 상태에 놓인, 지각없고 사악하고 근본 없는 국민으로 혹평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밀턴은 “신자가 다른 근거 없이, 목사가 그렇게 말했다는 이유로 어떤 사실을 믿는다면, 그의 믿음이 진실한 것이라 해도 그가 믿는 진리는 이단이 된다”고 말한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단지 남이 그렇다고 했기 때문에 믿는 것은 암흑시대의 미신이라는 것이다. 밀턴은 종교적 책임과 의무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 채 방종에 빠진 자들을 꾸짖는다. ‘아레오파기티카’의 유명한 비유다. “쾌락과 이익에 탐닉하던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종교가 대단히 복잡하고 자질구레한 거래가 수반되는 사업이며, 자신이 다른 직업은 몰라도 그 분야에는 정통할 수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종교 문제를 전적으로 맡아 관리해 줄 대리인을 찾아냅니다. 그 대리인은 저명하고 존경받는 성직자여야 합니다. 부자는 성직자를 믿고 자신의 종교의 창고를 모두 위탁합니다. 자물쇠도 열쇠도 모두 성직자의 관리에 맡깁니다. 그리고 사실상 그 성직자를 자신의 종교로 삼습니다. 그는 성직자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신앙심에 대한 충분한 증거이자 보증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종교가 더 이상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과 분리돼 이동할 수 있으며, 그 훌륭한 성직자가 자신의 집에 출입할 때마다 종교가 자신에게 가까이 오고 간다고 말합니다.”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구치소 생활 당시, 손주는 못 와도 목사는 와서 예배드려야 된다며 종교적 멘토인 김장환 목사에게 크게 의지했다. 김 목사가 다녀가면 MB는 잠도 잘 자고 식사도 잘 했다. 김 목사는 MB가 수감된 뒤 매주 구치소를 찾아 약 20분간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이 전 대통령은 장로로서 독실한 신앙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그마저 김 목사에게 의존한 것을 보면 일반인들이 저명한 목사에게 자기의 종교를 위탁하는 경우는 더 많을 것이다. ‘근대적 개인’과 거리가 먼 모습이다. 한국 교회, 한국 사회는 다를까. 성숙한 개인이 등장하지 못한 사회, 흔드는 깃발 따라 나부끼는 군중이 다수인 사회라면, 민주주의도 지방자치도 위태롭다. 21세기를 활보하는 전근대적 인간은 갓 쓰고 오토바이 탄 어릿광대처럼 우스꽝스럽다. 4차 산업혁명시대에 ‘근대적 개인’을 말해야 하는 현실이 답답하다.

박상익 우석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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