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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황교익] 봄, 꽃이 피었습니다



어머니는 곱게 한복을 입고 화사한 양산을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넥타이에 양복을 입었고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저도 다림질 말끔히 한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손에는 찬합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렇게 집을 나섰습니다. 네댓 살 봄나들이 기억입니다.

버스는 꾸불꾸불 산길을 올라 마진터널(마산-진해터널)을 지났습니다. 창으로 내려다본 산자락에는 벚꽃이 양떼구름으로 떠올랐습니다. 어머니처럼 한복을 입은 여자들과 아버지처럼 양복을 입은 남자들 사이를 헤집고 걸었습니다. 벚꽃은 머리 위에 있었습니다. 서커스단의 커다란 천막이 보였습니다. 천막 옆에 코끼리가 묶여 있었습니다. 냉차와 솜사탕을 파는 수레가 있었고, 야바위꾼이 있었습니다. 장구를 치며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진해 군항제라고 하지만 그때는 벚꽃장이라 하였습니다. 벚꽃이 필 때 열리는 난장이라는 뜻입니다. 벚꽃 아래에서 어른들은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놀았습니다. 어린 저는 솜사탕 들고 서커스단 광대를 쫓아다녔습니다. 봄바람에 벚꽃이 날렸습니다.

사춘기에 시를 읽었습니다. 꽃 시가 많았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우는 게 슬픈 것인데, 그게 찬란하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이별의 슬픔을 인내와 체념으로 승화한 시라는 선생님의 설명은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시험에 나오니 외우기는 하였습니다.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것만 오히려 남았읍디다/ 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읍디다.” 동백꽃에서 나는 목이 쉰 여자의 노래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별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치며 지나갑니다. 우정을 쌓고 사랑을 함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만날 때는 영원할 줄 아나 지나면 그뿐입니다. 오래되면 이름도 얼굴도 흐릿합니다. 그때에 만남이 있었는지도 잊습니다. 당장의 하루하루에 붙잡혀 살아갑니다.

봄이면 벚꽃을 쫓아 놀러 가는 일이, 명절 같습니다. 가족과 친구와 애인과 동료와 벚꽃놀이를 갑니다. 저도 봄이 오면 개화 날짜부터 확인을 하는 게 일이었고 친구들을 모아다 놀았습니다. 자식들이 생기자 진해 벚꽃장의 부모님처럼 아이들을 데리고 길을 나섰습니다. 손에 솜사탕을 들리고 무동을 태워 벚꽃 냄새를 맡게 했습니다.

쉰이 다 되어, 4월 어느 날에 섬진강을 가게 되었습니다. 일로 간 것이라 동행자가 없었습니다. 쌍계사 계곡을 걸었습니다. 평일이었고 벚꽃이 질 때라 계곡은 적막하였습니다. 분분 날리는 벚꽃 아래 저는 혼자였습니다. 벚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습니다. 어머니께 전화를 하였습니다. 잔소리 듣기 싫어 특별난 일이 아니면 전화를 잘 하지 않는데, 그날 벚꽃 아래에서 전화를 하였습니다.

“오데고?” “출장. 하동.” “아이고, 멀리도 갔다. 밥은 먹고 다니나. 언제 집에 가노. 차 가져갔나. 기차 타고 가지 그 먼데를 와 차를 가져갔노.” 잔소리 시작입니다. 저는 그냥 듣습니다. 쌍계사 계곡이라는 말도, 벚꽃이 지고 있다는 말도, 그 얼마 전 먼 길 가신 선친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고, 그래서 전화를 했을 뿐입니다. 벚꽃이 저에게 시킨 일이었습니다.

꽃은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고 슬픔이 이는 것은 그 꽃을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고 없는데 진달래가 무에 필요한가요. 봄날의 찬란함도 슬픔으로 가득하고, 들리는 것은 눈물 어린 소리뿐입니다.

아이들이 4월에 떠났습니다. 떠나겠다고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보아야 할 봄꽃이 핍니다. 먼 남쪽 바다의 봄바람이 안산 교정의 벚나무에도 닿아 메마른 가지에 꽃을 올릴 것입니다. 아이들은 없는데, 꽃이 필 것입니다. 벚꽃이 피어 슬픔을 보탭니다. 함께할 아이들도 없는데, 봄은 왜 오고 꽃은 왜 또 피는지.

4월이면 누구나 한번은 벚꽃 아래에 있습니다. 떠난 이들을 그리워하고, 많은 이들이 아이들도 함께 떠올립니다. 벚꽃 아래에서는 아이들도 함께 있습니다. 벚꽃 아래에서는 혼자여도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가 아니라고, 벚꽃이 핍니다.

황교익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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