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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한승주] 여성을 위한 나라는 없다



폭풍처럼 여러 사건이 몰아쳤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사건, 버닝썬 게이트, 다시 수면으로 떠오른 장자연 리스트 사건. 사회 특권층의 성폭행·몰래카메라·마약·고위층의 비호·고의적인 부실수사 등 여러 가지가 얽히고설킨 사건들인데 여기에는 간과되기 쉬운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여성을 남성과 똑같은 사람이자 존귀한 인격체로 여기지 않고, 누군가에게 접대할 수 있는 상품이자 수단으로 취급했다는 것이다. 여성의 몸을 고작 성적 도구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한국 여성의 취약한 인권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나하나 따져보자.

김 전 차관 사건에는 동영상이 존재한다. 건설업자 윤중천씨가 고위층 인사들을 강원도 별장에 불러 파티를 열고 접대하는 자리. 그곳에 여러 명의 젊은 여성을 동원해 성접대를 했다는 의혹이다. 동영상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우리는 그 자리를 영화의 한 장면으로 상상해볼 수 있다. “대중은 개 돼지”라는 유명한 대사가 나오는 영화 ‘내부자들’이다. 중년 남성들이 나체의 젊은 여성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술파티를 하고, 한 명씩 끼고 난잡한 행위를 하던 장면 말이다. 이후 현장에 있던 여성이 성폭행 피해를 주장하며 고소까지 했지만, 검찰은 어찌된 일인지 김 전 차관에게 무혐의 판정을 내렸다.

다음은 버닝썬 게이트. ‘빅뱅’ 멤버였던 승리는 외국인 투자자 접대 자리에 여성들을 불러 성매매를 알선했다는 혐의 등을 받고 있다. 가수 정준영은 여성 몰래 성관계 영상을 촬영해 이를 단톡방에 올려 공유했는데 피해자가 10여명에 이른다. 단톡방 멤버 중 한 명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정준영에게 여성을 보내기도 했다. 장자연 리스트 사건은 2009년 신인 배우 장자연이 유력 인사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모욕적인 일을 당하고 세상을 저버린 일이다. 그가 남긴 자필 문서에는 고위층 명단이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제대로 된 수사를 받지 않았다.

승리와 정준영 이름이 나왔을 때만 해도 일부 연예인의 일탈인가 했지만 우리는 곧 알아버렸다. 이것이 갑작스러운 인기와 부에 휘청댄 연예인만의 비뚤어진 성의식이 아니라는 것을. 대학생, 연예인, 중년의 사회 고위층 상당수가 별다른 죄의식 없이 그들만의 공간에서 여성을 상품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여기에 잊힐 만하면 나오는 데이트 폭력 사건, 아무리 단속해도 계속 나오는 몰래카메라에 여성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미투 운동(#MeToo·나도 당했다)’이 촉발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김학의 사건 피해자는 얼굴을 꽁꽁 가린 채 “제발 살려달라”고 호소하고, 장자연 사건의 유일한 증인 윤지오씨는 두려움에 떨며 “신변 보장을 해 달라”고 외친다. 정준영 단톡방 피해 여성들은 “제발 우리의 신원은 밝히지 말라”며 울먹인다. 여전히 피해자가 스스로 숨어 가해자들이 안전할 수 있는 세상인 것이다.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번질 때 기대했던 건 이런 게 아닌데 말이다.

김학의 사건 수사단이 다시 꾸려졌지만 제대로 작동할지는 회의적이다. 1, 2차 수사가 왜 무혐의로 결론났는지, 비호세력이 있었는지 이번엔 과연 밝혀질 것인가. 연예인을 봐준 경찰의 윗선은 어디까지 파헤쳐질 것인가. 장자연 사건 역시 또다시 흐지부지되지는 않을까.

이 사건들이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으로 인한 갈등이나 여야 대결구도 등 정치적인 사안에 휘둘리지 않고 여성 인권적인 면에서 엄중히 재수사되길 바란다. 클럽에 놀러 갔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약물에 중독돼 정신을 잃어 성폭행을 당하고 몰카까지 찍혀 그 영상이 유포될 수 있는 나라, 그래도 가해자들은 큰 처벌을 받지 않는 국가. 만약 그렇다면 미투 운동 때 나왔던 ‘여성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외침이 다시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증거 동영상도, 피해자도, 리스트도 있는 사건마저 진실 규명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의로운 나라에 살고 있다 말할 수 없다.

한승주 편집국 부국장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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