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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박지훈] 약자의 게임





서평 기사에 이렇게 많은 악플이 달린 경우는 별로 없었다. 문제의 책은 알바 노동자의 팍팍한 삶과 알바 노동이 지니는 가치를 전한 책 ‘이것은 왜 직업이 아니란 말인가’. 기사는 “나는 꿈꾼다, ‘꿀알바’의 나라를…”이라는 제목을 달고 지난 1월 26일자 국민일보 지면에 실렸는데, 네이버 댓글창에는 맥도날드 라이더(배달 노동자)인 저자를 욕하는 댓글 100여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당시 네티즌의 ‘공감’을 많이 얻은 댓글 몇 개만 소개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읽다가 개소리라 다 읽기가 역겹다” “그럼 공장에 가 ×× 그럼 야간수당 주휴수당 다 나오니까” “꿀알바 찾지 말고 꿀알바 고용주가 되려고 노력해라” “나이 먹고 인생 그렇게 살지 맙시다”….

국내 알바 노동자는 44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주렁주렁 악플을 달았던 사람 중 누군가는 알바노동자거나, 알바노동자의 친구 혹은 가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무엇이 수틀렸던 건지 사람들은 알바를 어엿한 직업으로 대접해 달라는 저자의 주장을 깎아내렸다. 이 책에 쏟아진 비판은 거칠게 해석하자면 이런 맥락이었을 거다. 알바로 먹고 사는 사회를 만들자고 독려해서는 안 된다, 그건 사회에 기생하려는 한심한 주장이다, 또래들이 고생해서 일껏 이룩한 성취를 좀먹는 행위다….

근면과 성실만이 지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얼마간 느슨하게 살아보자는 주장은 반드시 필요한 목소리일 것이다. 예컨대 카를 마르크스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오늘은 이 일을 내일은 저 일을” 하면서 살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내다보면서 이렇게 적었었다.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평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문제는 청년 이슈에 전향적인 접근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등장할 때면 이를 고깝게 여기거나, 혐오의 뉘앙스가 한가득 담긴 비판을 늘어놓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데 있다. 한국에서 청년이 청년 문제를 지적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청년지식공동체인 ‘청년담론’ 대표인 김창인씨는 두산그룹이 인수한 중앙대에 2009년 입학해 대학의 기업화에 항의하는 활동을 펼치다가 2014년에 자퇴서를 냈다. 지난 1월엔 대한민국 청년 100명의 인터뷰를 갈무리한 ‘청년현재사’ 출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청년 문제에 매달린 인물인 셈이다. 그는 ‘청년현재사’ 출간을 앞두고 책에 실린 내용을 온라인에 연재했는데 이때도 종종 악플이 엄청나게 달렸었다. 최근 서울 마포구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김씨는 “정말 위험한 현상”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생각하기엔 사회 구성원들이 ‘약자의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아요. 스스로 ‘약자성’을 확보하려고 하는 거죠. ‘내가 너보다 더 힘들다’고 강조하면서 징징대지 말라고 상대를 깔아뭉개는 거예요. 사회가 구성원들을 제대로 보호해주지 않으니 자신이 더 약자라고 주장하는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런 현상이 심화되면 파시즘이 생기는 거죠.”

실제로 청년 문제뿐만 아니라 여성 장애인 이주민 등 한국사회 가장자리에 놓인 이들의 문제가 거론되면 항상 비난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곤 한다. 안전망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니 개인이 모든 짐을 걸머져야 하고, 유일하게 삶의 뒷배가 돼주는 배타적인 가족주의에만 매달리는 게 한국인의 생존법이다. 아이들은 배려보다는 무시와 비난부터 배우게 된다.

튼튼한 사회 안전망을 짜자는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상대가 처한 곤궁한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한다면 어떤 해법이 나오든 한국사회는 백년하청일 수밖에 없다. 논픽션 작가 은유가 최근 내놓은 에세이 ‘다가오는 말들’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대목에 밑줄을 그었다.

“내가 아는 공감 방법은 듣는 것이다. 자기 판단과 가치를 내려놓으면서, 가령 ‘왜 이제 말하느냐’ 심판하는 게 아니라 왜 이제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해하려 애쓰면서, 동시에 자기 경험과 아픔을 불러내는 고강도의 정서 작업이다. 온몸이 귀가 되어야 하는 일. 얼마 전 본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당신이 할 말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들을 준비를 할 거예요.’”

박지훈 문화부 기자 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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