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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역법 따르던 부활절 로마법에 맞춰 날짜 합의… 기독교, 국교화 계기 마련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장면을 그린 그리스 메갈로 메테오론 수도원 성화. 위키피디아


그리스어로 기록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신앙고백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년). 위키피디아




콘스탄티누스는 주후 306년 34세에 군주 자리에 올라 65세로 죽을 때까지 로마제국의 황제로 군림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에 호의적이었다. 밀라노 칙령(313년)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예배드리는 신도는 로마의 박해를 받지 않게 됐다. 그뿐 아니라 몰수된 교회의 재산도 돌려받았다.

기독교는 4세기에 로마제국 내에 널리 전해져 있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으로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 로마 이베리아반도까지, 그리고 예루살렘 남쪽으로는 이집트로 해서 북아프리카까지, 지중해 지역을 둘러싸고 교회들이 세워졌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비롯한 동쪽 교회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의 관계를 두고 ‘아리우스 논쟁’을 겪었다.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325년 콘스탄티누스는 교회 주교들을 니케아(지금의 터키 이즈니크)로 불렀다. 첫 번째 니케아 공의회가 열린 것이다. 여기서 아리우스를 정죄하고 예수의 신성(神性)을 확고히 하는 신앙고백을 만들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제국 1800개 교회 모든 주교를 초청했으나, 현재 남아있는 기록은 니케아 신조를 ‘교부 318명의 신앙고백’이라고 적었다. 대표하는 지역 교회는 다양했지만 지리적인 접근성으로 동쪽 교회 참가자 비율이 높았다. 당시 주교들은 성직자 둘, 집사 셋과 동행했다. 실제 니케아에 모인 사람은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니케아 공의회는 신앙고백 외에도 성직자와 예배 관련 규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부활절 날짜를 논의했다. 교회마다 서로 다른 달력으로 예수께서 부활한 날을 계산해 혼란을 겪었기 때문이다.

유대 전통 달력은 우리 음력처럼 초승달에서 한 달이 시작하고 열두 달이 한 해를 이루며 윤달 윤년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주신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이 가장 큰 명절이다. 율법서 규정(출애굽기 12장, 레위기 17장, 신명기 16장)을 따라 아빕월(나중에 닛산월이라 부름) 제14일에 유월절을 지켰다. 그리고 제15일부터 7일 동안 누룩이 없는 빵을 먹으며 무교절 축제를 보냈다. 예수 시대에 이르러 유월절과 무교절 축제 7일을 합쳐 8일 동안 유월절 축제를 지냈다.

복음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유월절 기간이었다고 적고 있다. 무교절 첫째 날에 제자들이 유월절 음식을 어디에 준비할지 예수께 묻는다.(마 26:17, 막 14:12, 눅 22:7) 예수는 제자들과 유월절 음식으로 ‘마지막 만찬’을 하고, 그날 잡혀가 이튿날 십자가형을 받고 돌아가신다. 그리고 안식일이 지나고 그 주간 첫날 부활하셨다.

로마제국은 주전 45년부터 태양력인 율리우스력을 썼다. 유대 달력에 따라 부활절을 지키면 마치 우리의 추석이나 설처럼 요일이 달라진다. 321년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제국 모든 시민이 일요일에 쉬도록 했다. 이미 주후 2세기에 일부 교회는 부활절을 닛산월 어느 일요일로 지켰다. 하지만 음력이다 보니 닛산월 14일이 봄의 시작인 춘분보다 더 먼저일 때도 있어 혼란을 빚었다.

니케아 공의회가 남긴 문서는 부활절 논의와 관련해 이같이 적었다. ‘우리는 또한 부활절과 관련하여 합의에 이르렀다는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여러분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이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지금까지 유대 관습을 따른 동쪽 교회 모든 형제는 옛날부터 부활절을 함께 지켜온 우리 모두와 이제부터 로마의 관습을 지킬 것입니다.’

모든 교회는 부활절을 함께 지키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 지금의 부활절 날짜 계산법에 이르렀다. 유월절이 봄의 축제이므로 봄의 시작인 춘분이 지나고 유월절 보름(제14일)이 지난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키고 있다. 단 그레고리력이 시행된 1582년 이듬해부터는 동·서 교회가 다른 달력을 사용해 부활절 날짜가 다르다.

니케아 공의회로 교회는 기틀을 잡아 처음으로 교리를 정리하고 하나의 신앙고백을 갖게 됐다. 부활절을 함께 지키는 것이 중요했던 이유는 4세기 초 이미 사순절(부활절에 이르는 7주)과 성령강림절(부활절 7주 후 일요일)이 교회절기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가 부여한 권위로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한 것은 아니다. 그는 평신도였다. 황제로서 교부들을 불러모아 개회모임을 주관했고 논의에도 참여했다. 로마제국은 니케아 공의회로 유대 전통과 선을 그었고 이후 기독교를 국교로 삼는 계기를 마련했다.

박여라 영문에디터 ya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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