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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최연하] 혜자와 패터슨의 눈부신 오늘



최근 종영한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내게 영화 ‘패터슨’을 떠올리게 했다. ‘눈이 부시게’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에 대해, 그리고 ‘패터슨’은 지금, 여기의 순간이 바로 예술이고 우리의 일상이 곧 예술작품임을 알게 한다. 둘 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임을 깨닫게 하는데 ‘눈이 부시게’에서 알츠하이머를 앓는 김혜자는 기억의 한 순간 속에서, ‘패터슨’의 주인공 패터슨은 현재의 생생한 상상력 속에서 어떤 ‘눈부심’을 경험한다.

영화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 패터슨시에 사는, 도시 이름과 똑같은 버스기사 패터슨(애덤 드라이버)이 주인공이다. 루틴하기만 한 그의 일주일을 다룬 이 영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동일한 패턴의 반복을 보여준다. 패터슨은 매일 아침 6시쯤 알람 없이 일어나 잠든 아내에게 입 맞추고 간단한 식사를 한 후 차고지까지 걸어서 출근한다. 그 사이사이 시상이 떠오르면 운전석에서 혹은 점심으로 싸온 도시락을 먹으며 시를 쓴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애견과 어김없이 산책을 하고 동네 바에서 맥주 한 잔과 함께 하루를 마감한다. 그렇게 영화는 패터슨의 별다를 것 없는 일주일을 따라간다. 특별한 목표 없이 버스 노선에 따라 충실하게 운전을 하는 패터슨의 일상은 우리네 삶의 거의 모든 순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패터슨시를 관통하는 강물처럼 무심히 흘러갈 뿐이다. 하지만 패터슨이 시를 쓸 때면 도시 전체가 그를 축복하는 듯 화면 가득 환상적인 선율이 흐른다. 영화에서 패터슨의 시작(詩作)은 일상이고, 그의 일상은 곧 작품이 된다. 이처럼 작품이 되는 행위들이 매순간 반복되고, 습관처럼 시를 쓰며 시적 영감으로 충만한 비밀스러운 패터슨의 ‘오늘들’은 같은 것 같지만 늘 새롭게 갱신된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머릿속의 기억을 지우는 병을 앓는 주인공 김혜자가 자신에게 가장 빛났던 시절인 25세로 돌아가면서 기억의 판타지가 펼쳐진다. 도깨비처럼 김혜자의 기억은 요술을 부리며 50년의 시간을 왕복하지만 이 모든 것이 꿈과 착각이었음이 드라마 후반부에 드러난다. 치매에 걸린 김혜자에게 과거 현재 미래는 나선형처럼 역동적으로 융합하며 새로운 경험의 차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어쩌면 그녀는 ‘지금, 이곳’의 삶을 더욱 생생하게 하기 위해 기억과의 접촉을 시도하며 스스로 병을 치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순간이 빛나는 시간이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를 둘러싼 매순간들이 망각을 기본으로 한다면, 해상도는 각기 다르겠지만 우리 모두의 머릿속엔 이미 지우개가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오늘의 순간을 영위하라는 혜자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각인되는 이유이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라. 오늘을 살아가라.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다.” 드라마의 마지막 신에서 김혜자의 내레이션이 벚꽃 잎처럼 가볍고 황홀하게 떨어진다.

‘눈이 부시게’는 기억의 처소가, ‘패터슨’은 패터슨이 살고 있는 현재의 도시가 배경이자 주제이다. ‘눈이 부시게’가 기억의 특별함을 상기시키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에 린치를 가한다면, ‘패터슨’은 망각의 영역으로 빠르게 멀어지는 현재의 순간들을 예민하게 포착해서 시적으로 응대하는 주인공의 일상을 보여준다. 반복되는 일상, 복잡다단한 현대사회 속에서 권태로운 피로에 빠지지 말고 현재를 만끽하라는 김혜자와 패터슨의 메시지는 그 자체로 시(詩)가 된다. 자신의 육체와 시간과 공간을 전유하며 스스로 작품이 되는 놀라운 경지를 혜자와 패터슨을 통해 알게 됐다. 그러니 “오늘을 살아가라.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다.”

최연하(사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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