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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칼럼] 김학의가 쏘아올린 작은 공



공수처 있었으면 김학의 사건덮였을까, 검찰은 김은경 윗선 밝힐 수 있을까

두 사건은 검찰과 권력을 견제할 공수처 필요성 절감케 해…
212년 전 영국의 법안 통과가 결국 노예제 폐지 이끌었던 것처럼 제도화는 필수


꼭 212년 전 오늘(1807년 3월 25일), 영국 의회는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킨다. 이는 프랑스 미국 등에도 영향을 줘 수십년 뒤 인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제도 중 하나인 노예제 폐지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서구의 노예해방사를 좇다보면 영국의 정치가이자 신앙운동가인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를 만난다. 보수 하원의원이었지만 어느 자유주의 성향 정치인보다 노예 폐지에 앞장서 노예무역을, 1833년 죽기 며칠 전에는 노예제 자체를 끝장냈다. 1500년대 중반부터 노예 무역을 주도한 영국은 250년 동안 아프리카인 250만명을 팔아치운 노예 공급 1위 국가였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경제 주축은 노예무역이었다.

영국의 반노예제 운동에 불을 붙인 건 1781년 노예무역선 종(Zong)호 사건이다. 노예를 너무 많이 싣고 리버풀을 떠나 자메이카로 가던 종호는 보급 부족과 위생 문제에 봉착했다. 선장은 노예 133명을 바다에 버려 문제를 해결한다. 선주는 이 피해를 보험회사가 보전해줘야 한다고 소송을 했고, 법원은 무자비하게 선장이 배를 구하기 위해 ‘화물’을 바다에 던진 경우라고 판결했다. 반노예운동을 자극한 기폭제가 됐다. 250년 노예제를 끝낸 건 선장의 사악한 행위에서 시작됐다.

전 법무차관 김학의가 지난주 심야에 태국으로 가려다 공항에서 긴급출국금지를 당했다. 성접대를 넘어서 특수강간 등의 혐의를 받고 있고, 당시 수사 축소·은폐 의혹까지 불거지고 있는 상태다. 무죄추정 원칙이 있으니 김학의와 수사 라인을 위법자로 단정하는 건 부당하다. 그런데 점점 커져가는 의혹을 뒷받침할 만한 증언들이 나오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의 동영상이나 성접대 의혹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고위공직자의 자질 문제이고, 개인 일탈에 관한 것이다. 위법행위가 있고 공소시효가 남아 있으면 법정으로 가져가면 된다. 정말 심각한 것은 경찰청장 말대로 김학의라는 걸 명백히 인지할 수 있었던 동영상, 당연히 차관 기용에 문제가 심각함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정황, 두 차례 이상 검찰과 경찰의 거의 의도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축소·은폐 수사 의혹에도 불구하고 왜 차관이 되고 무혐의를 받았냐는 것이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어떤 힘이 작용했기에, 무슨 사정이 있었기에. 요즘 적폐청산 하는 실력으로 검찰이 주변까지 탈탈 털거나, 별건수사 방식으로 며칠만 했어도 의혹의 진위는 알 수 있었을 게다. 일찍 끝났을 사안이다. 왜 경찰 수사라인은 수사 4개월 만에 모두 바뀌어버렸나. 왜 경찰이 적용한 특수강간 혐의를 검찰은 쏙 빼버렸을까. 정상적인가.

당시 수사 검사들이나 관련 고위직들이 아직 검찰에 남아 있다. 검찰이 제대로 밝히겠냐는 의심은 합리적이다. 그러니 특임검사든 특별검사든 독립성을 보장받는 또는 현직 검사가 아닌 외부인을 임용해 수사를 하는 게 마땅하다. 그렇지 않으면 수사 신뢰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은 김학의 건과 비슷하게 흐를 뻔했다. 시초부터 이 정권의 핵심 인사들은 단지 체크리스트일 뿐 지난 정권의 블랙리스트와는 다르다고 했다. 정권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는다고, 우리 편 꽂으려는데 그만두지 않는다고, 임기가 보장된 사람 찍어내는데 어떤 건 직권남용이고 어떤 건 감사인가. 청와대 대변인은 법원 판결을 인용, 블랙리스트 개념을 “지원을 배제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정부 조직을 동원해 치밀하게 실행에 옮긴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문화계의 민간 블랙리스트만 좁게 해석한 것이다. 그건 그 사건의 블랙리스트일 뿐이다. 이번처럼 내 사람 심기 위해 공공기관장과 임원을 몰아내는 건 괜찮단 말인가. 이 정부 사람들의 내로남불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이쯤되면 수치심은 집에 두고 다니는 모양이다.

김학의·김은경 건의 핵심 의혹은 ‘윗선’의 지시 여부다. 한 건은 검찰에 아직 관련자들이 남아 있어 치부를 드러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고, 다른 한 건은 청와대 등 살아 있는 권력을 제대로 건드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환경부 리스트 건을 어영부영 처리했다가는 세월이 지나 김학의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이 두 사건을 보면 역시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가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결론에 이른다. 최선은 아니지만 우리 정치·사회의 구조에서 검찰을, 권력을 견제하는 기구로서 가장 필요하다. 공수처가 존재했다면 김학의 사건이 덮혀졌을까. 버닝썬 사건은 단순 폭행에서 봐주기 수사, 성폭행, 마약, 탈세에 이어 경찰 유착과 청와대 민정수석실 직원 연루 의혹으로까지 발전했다. 인터넷에선 ‘버닝썬이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표현을 쓴다. ‘김학의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검찰 견제는 물론 법 위에서, 천상에서 노는 일부 권력자들의 근본적인 통제방안을 만드는 계기가 돼야 한다. 250년 전 노예를 화물 취급해 바다에 익사시킨 행위가 작은 공이 돼 결국엔 노예무역과 노예제 폐지로 나아간 것처럼.

수석논설위원 m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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