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신용목] 우리의 삶을 있게 한 것



유리에 얼룩이 보였습니다. 섀시를 열기 위해 손을 댔거나 아래를 보려고 이마를 짚었던 자국일 것입니다. 니트 소매를 당겨 쥐고는 얼룩을 닦았습니다. 얼핏얼핏 무지갯빛 같은 게 비쳤습니다. 입김을 불고 다시 서너 번 문질렀습니다. 새 떼가 가까운 곳에서 먼곳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새 떼가 사라진 곳에서도 새 떼는 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홍콩야자와 고무나무는 그새 또 새 싹을 밀어올렸습니다. 하도 투명하고 여려서 가만히 손끝을 갖다대면 잎 어딘가 꼭 감았던 눈을 뜨고 아기처럼 울음을 터트릴 것 같습니다. 녹보수에는 깍지벌레가 자주 끼는데, 아무리 잡아도 없어지지가 않습니다. 아직은 집 안 공기가 쌀쌀하여 베란다에 나가 석유난로를 켰습니다. 켤 때와 끌 때 기름 냄새가 나, 바깥에서 켜서는 들고 들어오고 또 들고 나가 끕니다. 주전자를 씻고 물을 받아 돼지감자 몇 개를 띄운 뒤 난로 위에 올렸습니다. 물방울이 튀며 자글거리다 자글거리는 소리를 데리고 하얗게 사라집니다. 오디오를 켜고 블루투스를 연결하고 오래전에 자주 듣던 곡을 눌렀습니다. 가끔 버그가 나 삐이, 하는 소리가 들리면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켜야 합니다. 커피콩을 갈고 물을 갈았습니다. 자주 커피가루를 흘려 휴지로 바닥을 훔치곤 합니다. 연하게 내린 커피를 들고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일곱시반부터 여덟시, 오늘 아침 삼십분간 있었던 일입니다. 이 모든 상념들이 가득 차 있던 풍경―내 인생 중 단 삼십분 동안의 일들을 하나하나 써나가며, 더는 살지 않는 자들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더는 살지 않는 자들이 가질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매일처럼 찾아오는 이 평온함이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생각이 불러오는 생각의 끝에서 다시 깨닫게 되는 사실들. 우리의 일상이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통렬한 진실들. 약하고 여리고 무엇보다도 아파할 줄 알아서 다치고 깨지고 버려졌던 사람들. 또한 그래서 힘과 권력과 그 모든 부조리와 모순에 맞서 뜨겁게 싸웠던 사람들.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은 삶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신용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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