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칼럼  >  기타

[너섬情談-이경훈] 아! 서울역



북한의 열차가 60여시간을 달려 베트남에 도착했다. 이 땅이 섬이 아니며 대륙과 연결되어 있음을 실감한다. 시베리아를 건너서 유럽과 만나고 중국을 거치면 베트남과 인도에 기차로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산 지 오래다. 며칠을 달려 유럽에 도착하는 열차를 상상하다 보니 다시 옛 서울역이 눈에 밟힌다. 지금은 뒷방으로 밀려난 노인처럼 초라하지만 한때는 최신의 새마을 열차가 출발하던 속도의 공간이며 여행을 떠올릴 때마다 부록처럼 따라오는 기억의 공간이었다. 이국적인 자태는 어떤 목적지도 흥분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지만 새로 지은 고속철도역은 입구가 어딘지 모를 정도로 밋밋하다. 건축학자 빈센트 스컬리는 고풍스러운 기차역을 철거한 후 지상권을 팔아 치우고 지하철역처럼 변해버린 뉴욕의 펜실베이니아역을 두고 ‘이전에는 신처럼 우아하게 도시에 들어왔지만, 이제는 생쥐처럼 허둥지둥 달아나기 바쁘다’고 한탄한다. 도시의 관문이자 중요한 기억과 상징의 매개로서 기차역에 대한 그의 소회에 크게 동감한다.

옛 서울역이 ‘문화역서울284’라는 정체성이 불분명한 공간이 되어 비어 있는 것은 매우 아쉽다. 전시나 작은 연주회, 강연도 할 수 있는 다목적 문화공간을 의도했겠으나 이미 쇠락의 기운이 역력해서 노숙인을 밀어내기에도 힘겨워 보인다. 아마도 철도역을 미술관으로 변모시킨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을 벤치마킹한 듯한데 현실은 이스탄불의 시르케지역에 가깝다. 오르세 미술관은 1900년에 만국박람회를 위해 세느강변에 기차역으로 지어졌으나 한동안 폐허로 방치되었다. 1986년 기차역과 플랫폼을 통째로 개조한 덕에 드라마틱한 전시장과 부속시설을 함께 갖게 되었다. 거기에 소장 전시품은 프랑스 미술이 최고조에 올랐을 때라고 할 수 있는 19세기 후반의 인상주의부터 20세기 초반의 미술에 집중되어 있다. 그 유명한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가 전시되어 있고 교과서에 실릴 만한 그림과 조각이 수두룩하다. 같은 시기의 전시와 공간이 어우러지고 과거와 현대가 절묘하게 만나서 개관한 지 삼십 년이 지났지만 촌스럽다기보다는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빛나는 골동품을 마주한 느낌이다.

반면에 이스탄불의 시르케지역은 호화 국제열차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의 출발역이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동명 소설과 영화로 유명세를 타는 덕에 이스탄불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이다. 하지만 과거의 영광은 철도박물관이나 화려한 실내장식으로 남아 있는 정도이고 대부분은 버스로 실려 온 단체관광객이 채우는 식당으로 변해 있다.

대륙으로 향하는 열차가 출발하는 서울역을 상상해본다. 진정한 오리엔트 익스프레스가 출발하는 국제철도역이다. 옛 서울역사를 정문으로 삼는 것이 어떨까. 기존 건물을 현관 삼아 뒤로 서부역까지의 구간을 현대적이고 투명해서 볕이 잘 드는 대합실 공간으로 만들면 좋겠다. 높이는 서울역의 돔보다는 낮춰도 무방하겠다. 한강부터 서울역에 이르는 철로를 지하화하는 계획이 선거 때마다 공약으로 등장하는 걸 보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플랫폼은 자연히 낮아지게 되고 그 위의 대합실 공간은 광장에서 계단 없이 바로 들어설 수 있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는 없애는 것이 좋겠다. 1990년대 이후 민자복합역사라는 이름의 기차역이 여럿 등장했지만 혼잡을 더하고 건물의 규모가 커져서 사람의 스케일을 넘어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차역도 백화점도 걸어서 접근하기 어렵다. 복합역사는 일본의 중소도시에 많이 있는 형태로 인프라가 부족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했다. 그러나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도로나 대중교통의 부하를 집중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게다가 간판에 가려 도시 관문으로서의 기차역은 없다. 주차장은 최소로 설치하는 것이 맞겠다. 그보다는 대중교통과 긴밀하게 연결돼 편하게 걸어서 들고 나는 것이 보편적인 대도시의 기차역이다.

마지막으로,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토론하고 계획해야겠다. 오르세 미술관의 교훈은 기차역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겉모습뿐만 아니라 버려진 철도역을 십여 년의 계획 끝에 완성했다는 사실에도 있다. 기껏해야 대여섯 달의 설계기간이 주어지고 가격으로 결정하는 발주방식으로 백년을 이어 갈 서울의 관문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첫 행선지는 파리다. 기차를 타고 오르세 미술관으로 향하는 여행은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아! 서울역.

이경훈(국민대 교수·건축학부)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