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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고승욱] 지역감정의 2019 버전



며칠 전 카카오톡 친구에게 메시지 숨기기 기능을 설정했다. 뜬금없는 동영상을 수시로 보냈지만 그러려니 했던 선배였다. 페이스북에서도 몇 명의 게시물을 차단했다.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었다. 모두 친절하고 상냥한 친구여서 차단한 사실을 알면 서운해 할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공유하자는 동영상에 일베가 만든 터무니없는 내용이 점점 늘어나고,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 국가주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때까지만 해도 불쾌한 기분을 혼자 달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과 광주를 놓고 극우주의자들이 쏟아낸 거친 말을 억지로 옹호하는 게시물에 인내심은 한계를 넘었다.

어디나 거친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친구 한 명쯤은 있다. 정치와 사회이슈에 적당히 관심 있는 평범한 중년 남성에게 대통령의 실책은 좋은 화젯거리다. 얼마 전에 저녁식사 자리에서는 먹고살기 팍팍한 현실이 육두문자와 함께 경쟁적으로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에서 극에 달한 노여움이 느껴졌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자영업자가 힘들고, 성급한 원전 폐기 정책으로 과학기술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불평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 친구는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든다는 핀잔에도 꿋꿋하게 말을 이어가다가 결국 선을 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학우대정책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386세대의 자기모순과 북한 퍼주기로 나아갔다. 경제정책만큼은 제5 공화국이 탁월했다는 주장이 5·18 유공자를 검증하자는 논리의 근거가 됐다. 참지 못한 몇명이 일어나면서 모임은 끝났다. 헤어질 때 누군가 투덜거렸다. “나도 후배들에게 보수적이라는 말을 듣지만, 요즘은 어딜 가나 태극기 전사가 있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집단적 혐오가 담긴 극단주의가 점점 커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평범한 직장인인 친구가 어느날 갑자기 극우 편향의 게시물을 카카오톡과 페이스북에 퍼나른다.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마치 화성에서 온 것처럼 말하면서 주위를 불편하게 한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다른 나라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별일 아닐 수 있다. 뉴질랜드 총기난사 사건처럼 미국과 유럽에서는 잊을 만하면 백인우월주의자의 총격전이 벌어진다. 과거 군국주의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일본 극우주의자, 아시아 패권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중국의 안하무인도 피곤하다. 그 옆에서 우리도 엉겁결에 핸들을 오른쪽으로 트는 것일지 모르겠다. 국내 사정도 있다. 극심한 경기침체가 극우를 키운다는 말은 상식이다. 정의를 외치지만 잘못된 관행을 되풀이하고, ‘내로남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진보 정권에 대한 실망과 냉소도 있다. 대통령의 팬덤이 보여준 과격한 댓글 문화의 반작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 이유 중에서 최근에는 합리적 보수주의를 오른쪽 끝으로 몰아붙이는 일부 정치인의 잘못된 행태가 두드러진다.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됐다고 보수적 사고를 지지했던 모든 사람이 하루아침에 공공의 적이 된 것이 아닌데도 그렇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시켰다고 청년실업 문제에까지 입을 다물 수 없는 노릇이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힘을 모아 세상을 바꾸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지만 한가지 관점으로 나머지를 모두 재단하고, 상대에게 이념적 프레임을 강요하는 상황이 국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나라를 경상도와 전라도로 나눠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정치적 이익을 얻었던 구태의연한 정치의 2019년 버전에 불과하다. 보수와 진보는 개인이 특정 사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가늠하는 상대적 지표에 불과하다. 참과 거짓, 선과 악의 영역이 아니다. 전쟁터에 들고나가는 무기는 더욱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를 ‘합리적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는, 필자와 같은 평범한 중년의 직장인을 오른쪽 끝으로 몰아가는 정치는 오래갈 수 없다.

고승욱 편집국 부국장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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