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칼럼  >  기타

[여의도포럼-이재열] 똑똑하고 존경 받는 기업



착한 일을 효율적으로 해서 돈까지 버는 사회적기업, ‘정부 실패’와 ‘시장 실패’ 모두 극복할 수 있는 대안
똑똑한 소비자와 투자자가 존경 받는 이런 기업 많아지면 세상은 더 살 만해질 것


한때 ‘호사분면’이 유행했다. 직장 상사를 네 가지로 나눈 유형론인데, 친절하지만 일을 못하면 ‘호구’, 일은 잘하지만 배려심이 없으면 ‘호랭이’, 일 못하는데 배려심도 없으면 ‘호래자식’, 일 잘하면서 친절하면 ‘호인’이란다. 혹시 직장인이시라면 귀하는 어디 속하는가.

기업도 마찬가지. 경제적 성과는 떨어지나 사회적 책임을 잘 감당하면 ‘착해 빠진 기업’, 이윤을 많이 남기지만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면 ‘얄미운 기업’, 사회적 가치와 재무적 가치 둘 다 충족하지 못하면 ‘멍청한 기업’, 재무적 성과를 내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면 ‘똑똑하고 존경받는 기업’이다. 공공성을 외면하고 효율성만 따지는 공기업이 있다면 얄밉겠지만, ‘착해 빠진’ 비영리조직은 당당하게 후원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기업은 착한 일을 효율적으로 해서 돈까지 번다. 그래서 공적인 일을 비효율적으로 벌이는 ‘정부 실패’나 효율적이지만 사회적 가치에 관심이 없는 ‘시장 실패’를 모두 극복할 대안으로 주목받는다.

근본적 변화는 영리기업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기업전략 연구의 대가인 하버드대 마이클 포터(Michael Porter) 교수는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에 사회적 가치를 녹여 중요한 성과지표로 관리할 것을 제안했다. 기업과 사회의 ‘공유가치’를 키워야 장기적으로 기업도 성장하고, 사회문제도 풀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간 도외시됐던 수요에 부응하는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생산성의 기준과 범위를 다시 정의함으로써 지역이나 협력사 클러스터의 생태계가 함께 발전할 수 있다고 한다.

초연결 사회가 낳은 기업 환경 변화는 ‘땅콩 회항’이나 ‘갑질’ 논란에서 보듯 ‘얄미운 기업’이 돌발적인 위험에 처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반대로 기업 성과를 오랜 시간 추적 조사한 연구들은 사회적 가치를 추구한 기업들이 장기적으로는 이윤만 추구한 기업보다 훨씬 성장률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똑똑하고 존경받는 기업은 이윤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기업을 둘러싼 이해당사자들의 관심과 행복도 존중하기 때문이다. 글로벌하게 보면 기업 평가 모델도 바뀌고 있다. 기존 재무적 가치 위주로 정의하던 기업의 성공을 환경, 비즈니스 모델, 지역사회, 거버넌스, 기업 구성원에 대한 긍정적인 영향력 등으로 새롭게 정의하여 표준을 제공하는 비콥(B-corp) 인증을 주도한 것은 비랩(B-Lab)이라는 미국의 비영리단체다. 이를 후원한 록펠러재단은 비콥이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잡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지금까지 50개국에서 1800개 이상의 기업이 인증 마크를 달았는데, 인증받은 한국 기업의 수는 아직 미미하다. 세계적으로 가치투자가 크게 늘었는데, 한국에는 아직 그 파고가 미치지 못했다.

사회적 가치 구현을 위한 대기업의 한국적 혁신 전략은 ‘톱다운’ 방식이다. 재계 순위 2위를 다투는 SK의 최태원 회장은 130개 사회적기업이 창출한 사회적 가치를 화폐단위로 측정해 인센티브를 주는 후원자 역할에 머물지 않고, 그룹 전체가 재무적 가치와 함께 사회적 가치를 동시 추구하도록 정관을 바꾸었다. 계열사들은 사회적 가치를 어떻게 측정할지 지표를 만드느라 부산하다. ‘돈 버는 것에 익숙한 임직원들이 착한 일을 기획하느라 고민하는 모습’은 매우 낯설지만, SK의 사회적 가치 창출전략은 새로운 혁신형 대기업의 등장을 예고한다.

공기업 DNA를 가진 포스코의 최정우 회장은 취임 후 비즈니스 파트너, 임직원, 사회와 더불어 함께 발전하는 ‘기업 시민’을 경영 이념으로 제시했다.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공헌하고 혁신성과를 중소기업과 공유하는, ‘기업 시민’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다짐이다. 삼성전자와 현대차도 사회적 가치 창출을 위해 이사진을 보강하고 투명성을 강화했다. 금융도 바뀌고 있다. 하나금융은 계열사들이 창출한 재무적 가치에 보태 사회적 가치를 측정하여 성과보상의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

‘얄미운 기업’ 욕하기는 쉽다. 그러나 사회적 가치가 선순환하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은 훨씬 어렵다. 사회적 가치를 산출한 기업이 더 많은 투자와 보상을 받게 하려면 측정 체계를 구축하고, 임팩트 투자를 촉진할 금융시장을 만들며, 소비자들이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를 분별할 수 있게 신호체계를 구현해야 한다.

세계 최고의 갑부 빌 게이츠는 2007년 자신이 중퇴했던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연설하면서 졸업생들에게 불평등 문제를 고민할 것을 당부했다. 자본주의의 양대 축인 시장과 기술혁신을 활용해 가난과 질병으로 인한 인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창조적 자본주의’는 기업과 학계, 시민사회와 정부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똑똑한 유권자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만들 듯, 똑똑한 소비자와 투자자가 존경받는 기업을 많이 만들면 세상은 더 살 만해질 것이다.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