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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장은수] 취향의 정치경제



“냅둬유!” 시골 마을에 있을 때, 이 말이 나오면 어떤 논쟁도 끝이 났다. 나는 더 이상 네 말을 듣지 않겠다, 나와 너는 보는 눈이 다르다, 더 말하면 친구나 부모라도 화를 내겠다…. 설득되지 않겠다는 고집보다 옳고 그름을 나중에 맡기자는 지혜가 이 말에 담겨 있다. 시간의 신이 결과를 드러낼 때까지 감정을 누그리자는 것이다. 이 말이 나왔는데도, 언쟁을 시도하면 충청도에서는 ‘고얀 사람’이 된다.

“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시죠.” 청년들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 가끔 이 말을 듣곤 한다. ‘꼰대’가 되기 싫다면, “냅둬유”란 말을 들은 후처럼, 말을 더 이상 덧대면 안 된다. ‘취존’에는 공동의 감각(common sense)에서 개인의 취향(individual taste)으로 인생 감각의 전면적 이동이 표현되어 있다. ‘전체적 인생 감각’이 아니라 ‘부족적 인생 감각’을 우선하는 세대적 격절이 작동한다.

사실, 상식은 얼마나 손쉽게 폭력이 되는가. ‘취존’이란 말을 제목 삼아 유행시킨 이수진의 작품에 나오는 아버지는 말한다. “남들과 다르다는 건 나쁜 거다. 너는 다른 아이들을 비웃고 놀려야 한다. 피부색이 다르거든 놀려라. 알겠느냐. 하는 행동이 다르거든 놀려라. 알겠느냐. 사랑하는 대상이 다르거든 놀려라. 알겠느냐. 팔다리가 부족하거든 놀려라. 알겠느냐. 그게 네가 살아남는 법이다.” 피부색, 행동양식, 사랑형태, 심신장애 등의 차이를 모자람, 틀림, 질병 등으로 여기는 몰이성의 시대는 지나갔다. 나이를 잊은 채 군복을 차려입고 깃발에 복종하는 ‘영원한 병장들’의 세상은 저물었다. 다수의 대열에 끼어야 산다는 생각은 컨베이어벨트에 종속된 채 일했던 포드주의 시스템의 산물이요, 유년에서 노년까지 평생 제복 입고 동작 맞춰 살았던 무개성 인생의 강박이다.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포드주의 세상에서는 기업의 생산성 향상과 노동자의 임금 상승이 연동했다. 눈부신 산업화와 함께 중산층을 대규모로 산출한 ‘기업 공화국’이자 ‘노동자 사회’였다. 이 세계에서는 생존에 유리하도록 집단의 감각과 나의 감각을 동일시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문제는 이 집단주의적 감각체계가 오늘날의 정보화사회와 잘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보혁명은 노동력을 집약했던 포드식 공장을 해체한다. 요즈음 분식집 곳곳에 등장한 자판기 로봇을 보라. 자동화가 어느새 일상 영역으로 확산된 것이다. 마이클 크레머에 따르면, 이 시대의 노동은 ‘오링이론’의 지배를 받는다. 오링은 둥근 고리처럼 생긴 고무이음매로,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공중폭발 사고를 일으킨 부품이다. 첨단기술 제품일수록 아주 작은 공정 하나만 잘못돼도 생산 제품 전체가 파괴되는 시대인 것이다. 이것이 자동화의 진짜 얼굴이다. 자동화는 노동생산성을 우선으로, 노동가격을 부차적으로 만든다. 저부가가치 노동은 기계화하거나 전 지구에서 분산처리 하고 소수의 고부가가치 노동을 집적한다. 더 이상 대규모 인원이 한 장소에서 일할 필요가 없다. 포드식 공장에서 나타났던 사회통합 기능, 즉 상층과 중층과 하층이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묶이는 일도 사라진다. 생산성 높은 최고는 최고끼리 뭉치고 처지는 이들은 처지는 이들끼리 뭉치는 ‘선별적 짝짓기’가 사회를 새롭게 조직한다.

이것이 취향을 퍼뜨린 사회물리적 힘이다. ‘취존’은 생존에 불리한 포드적 노동의 세계로부터 탈출하는 해방의 과정이고, 정보화 이후 출현한 생산 양식의 문화적 표현이다. ‘선별적 짝짓기’는 사회 곳곳에 일종의 부족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취존’은 이들 부족 각각이 공유하는 파편적 가치와 선별적 감성의 군집에 대한 승인 요청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평균’과 ‘취향’의 전투로 성장통을 앓는다. 평균의 반동적 세계는 소멸 중이지만 ‘취존’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이수진의 소설이 잘 보여주듯, ‘취존’은 자칫 “자신의 취향에 근거해 타인을 차별 대상으로 보는, 자신의 취향을 숭배하기 때문에 타인의 취향을 낮잡아보는” 구별 짓기의 전면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대한항공 일가와 같은 상류층의 윤리적 타락과 더불어 중산층 감각에 취해 빈곤계층의 취향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편향을 주의해야 한다. 민주주의 실패는 주로 여기에서 온다. 소외된 미국의 빈곤층이 트럼프를 당선시켰다. ‘취존’이 ‘공생’의 윤리를 망각하지 않도록 길들이는 도전이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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