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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권기석] 대학 총장의 ‘재취업’



학문을 업으로 삼겠다며 석사나 박사 과정을 시작하는 청년에게 목표를 물었을 때 ‘어느 대학의 총장이 되겠다’고 답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전공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되겠다거나 그 분야 난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대학 총장 선거철이 되면 여러 교수가 대거 후보로 나선다. 지난해 서울대 총장 재선거에는 9명이 출마했고, 3명으로의 압축 과정을 거쳐 현 총장이 선출됐다. 고려대에서도 교수 7명이 출사표를 던져 1, 2차 투표를 거쳐 최후의 1인이 총장이 됐다. 얼마 전 동국대 총장 선거에는 11명이 뛰어들었다.

왜 그렇게 총장이 되고 싶은지를 선의로 짐작해 보면 애교심의 발로일 것이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을 발전시키겠다는 포부가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경험적으로’ 출마 이유를 헤아려 보면 총장직이 여러 후보의 최종 목표일 것 같지는 않다. 학계 밖 세상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는 발판으로 총장을 꿈꾸는 분도 꽤 있는 듯하다.

대학 총장은 교수가 ‘재취업’하는 데 있어 매우 유리한 자리다. 업무를 수행하면서 조직을 운영한 경험은 다른 기관의 수장이 될 수 있는 필요조건을 충족시켜 준다. 교수 출신인 그들에겐 전문가 이미지라는 기본 점수가 있다. 세간의 때가 덜 타 청렴하고 투명할 것이라는 기대는 가산점이 된다.

이미 본보기가 된 재취업 선배가 여럿이다.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은 국무총리 후보가 됐다가 낙마했지만 정치권으로 옮겨 옛 민주당 대표를 지냈다. 김우식 전 연세대 총장은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쳐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냈고 현 정부에서도 총리에게 자문하는 국민안전안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이명박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인 이경숙 전 숙명여대 총장은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에 이어 지금은 아산나눔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최근에는 아직 정년퇴직 전이라 엄밀한 의미의 재취업은 아니지만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이 SK그룹 지주사인 SK의 사외이사 후보가 돼 이사회 의장으로 거론된다.

대학 총장이 학교 밖 요직에 기용되는 건 개인에게 좋은 일일지 모르지만 학문 공동체에는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친다. 학문 공동체는 일종의 경기장이다. 연구자들은 이 경기장에서 ‘인정투쟁’을 벌인다. 경쟁의 규칙은 누가 더 좋은 연구업적을 많이 내놓는가다. 이런 경쟁을 피해 행정 경험과 정치력으로 경기장 밖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생기면 경기장에 남은 사람은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대학 총장의 재취업은 미국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지만 이 소식을 접하는 학교 안팎의 반응은 싸늘하다. 지난해 6월 미국 하버드대 최초의 여성 총장인 드류 파우스트 사학과 교수가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의 이사를 맡는다고 발표했다. 11년 임기를 마친 지 불과 나흘 뒤였다. 그러자 하버드대 교내 신문인 하버드 크림슨은 ‘놀라워라! 하버드인이 기업으로 가다니’라는 제목의 칼럼을 싣고 노골적으로 실망감을 나타냈다. 주간지인 ‘워싱턴 이그재미너’도 “많은 학계 동료들이 분노하고 있다”고 전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대학 교수 출신이 정·관·재계에서 요직을 맡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다. 사람이 부족했던 ‘개발도상’ 시절에는 많이 배운 사람이 도처에서 필요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각 분야에 인재가 그렇게 부족해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국내 학문의 후진성 극복과 성숙을 위해 경기장 밖에서 출세하는 전문가는 그만 사라질 필요가 있다.

최근 주목할 현상은 전문가가 자신의 경기장에서 커리어를 마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전관예우 기회를 마다하고 시·군법원의 소액 사건 전담 판사로 돌아간 박보영 전 대법관의 스토리는 신선한 감동을 준다. 대학 총장을 지낸 뒤 평교수나 명예교수로 돌아가 연구에만 매진하는 ‘교수님’ 소식이 있으면 좋겠다. 세상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대학과 전문가 집단을 바라보는 국민의 눈높이도 높아지고 있다.

권기석 사회부 차장 key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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