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칼럼  >  기타

[가리사니-이도경] 유치원만 바꾼 장관, 유치원도 바꾼 장관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가 개학 연기 투쟁을 포기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난 4일 오후 5시10분 교육부 회의실에서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고 한다. 평일 오후 5시는 마감 때문에 노트북에 붙들려 있는 시간이다. 환호와 박수 소리가 기자실까지 들리진 않았지만 이런 소식을 전하는 교육부 관계자 얼굴에서 환호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에도 “한유총 소속 유치원 원장 3000여명이 모여 있는 단톡방 탈퇴 러시가 벌어지고 있답니다” “에듀파인(국가관리 회계 시스템)을 도입하겠다는 대형 유치원이 80%를 넘었대요”라는 낭보가 날아들었다. 교육부 로비에서 마주친 과거 유아교육 담당자는 “(한유총을) 못 건드릴 줄 알았는데 이런 날도 오는군요”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근래 보기 드문 ‘행복한 교육 장관’이다. 한유총의 ‘백기투항’ 불과 1시간 전쯤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학부모에게 죄송하고 고통을 참아주면 사립유치원을 뜯어고치겠다는 메시지가 완벽한 타이밍에 나왔다. 담화에서의 노기(怒氣) 등등한 모습은 세월호 희생자 명예 졸업식이나 강릉 펜션사고 빈소에서 퉁퉁 부은 눈으로 유가족에게 젖은 손을 내밀던 장면과 극명하게 대비됐다. ‘정치인의 무덤’으로 불리는 교육부 장관직을 수행하며 불의에는 단호하지만 약자에겐 따뜻한,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욕심낼 지도자 이미지를 수확하고 있다.

이런 그를 두고 운이 좋다는 얘기를 한다. 사립유치원 사태를 지켜보면서 고개를 끄떡이지 않을 수 없었다. 부총리 취임 직후 터진 비리 사립유치원 사태는 인사청문회에서 불거진 위장전입 논란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사립유치원을 향한 분노는 일회성이 아니었다. 학부모에게 축적돼 있던 분노는 어렵지 않게 모여 조직적으로 분출됐다. 언론도 양비론을 접고 한유총에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교육부는 퇴로가 없는 상황이었다. 유치원 비리의 방조범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돌격 앞으로’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어 보였다. 교육부 관료들은 전투 준비가 잘 돼 있었다. 사립유치원에 나랏돈이 투입되면서 공공성을 강화하라는 요구를 받아왔지만 한유총의 힘에 짓눌려 있었다. 한유총 때문에 한숨짓는 관료들을 숱하게 봐왔다. 벼르고 있었다는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비리 유치원 사태가 터지자 기다렸다는 듯 개혁 방안을 쏟아냈다.

무엇보다 한유총이 하수(下手)였다. 어설픈 동정론이나 유치한 색깔론은 실소를 자아냈다. 정부 지원을 요구할 때는 교육자라고 주장하다가 감사받을 때는 자영업자로 변신하는 뻔뻔함은 대중의 분노를 키웠다. 대오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벌인 개학 연기 투쟁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행위였다. 이런 모든 상황을 행운으로 치부하면 유 부총리로선 억울할 것이다. 전투를 진두지휘한 그의 공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운도 실력이다. 그래서 ‘사립유치원을 개혁한 장관’이란 브랜드를 전리품으로 챙겨 국회로 돌아가더라도 토 달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유 부총리는 유아교육부 장관이 아니다. 지금 유아부터 고등 교육까지 성한 곳을 찾기 어렵다. 사교육비는 학부모 어깨를 짓누른다. 중산층과 서민들은 노후 준비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고통 받는다. 고졸 취업은 취업률과 학생 안전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졌다. 대학은 몇몇을 빼면 취업 학원으로 역할을 축소하고 있다. 재정난에 빠진 대학들에 강사를 해고하지 말라는 요구는 공허하다. 무엇보다 교육이 계층을 고착시키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불신이 팽배하다.

유 부총리의 진짜 행운은 대입에 손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일 것이다. 유치원 비리는 이차방정식에 가깝다. ‘정의 대 불의’로 전선이 단순하다. 대입은 학생, 학부모, 교사, 교수, 학원, 전문가, 시민단체가 얽힌 ‘킬러 문항’이다. 대입을 섣불리 건드리란 얘기가 아니다. 고교학점제를 꺼냈으면 미래형 대입을 어떻게 논의할지 밑그림이라도 설명해야 옳다. 지금처럼 외면만 하다가는 지난 2년간 반복된 소모적인 정시 비율 논쟁이 재연될 개연성이 높다. 유 부총리도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유치원만 바꾼 장관’인가, 아니면 ‘유치원도 바꾼 장관’인가. 선택은 유 부총리 몫이다.

이도경 사회부 기자 yido@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