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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홍인혜] 한때는 다 살아있었다



양계장에서 나고 자란 닭의 생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닭들은 짧은 평생 몸을 돌릴 수도 없는 좁은 우리에서 기계적으로 알을 낳았다. 그러다 소용을 다하자 도축을 위해 칸칸이 포개져 트럭에 실렸다. 우리가 ‘닭장차’라고 부르는 그것이었다. 떼로 부화해서, 떼로 착취당하다가, 떼로 죽으러 가는 운명이었다. 자동차가 달리자 창살 틈바구니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바깥구경을 하는 닭들이 둥그런 눈동자를 깜박이며 사방으로 고개를 틀어댔다. 죽기 직전에야 처음으로 쐬어보는 바깥바람에 나부끼던 터럭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그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 영영 닭고기를 못 먹을 줄 알았다. 세상이 신기한 걸 알고, 바람이 시원한 줄 아는 그 생명체들을 공산품처럼 찍어내는 시스템이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쇼크는 금세 잊혔다. 부끄럽게도 나는 얼마 안 가 닭갈비도 먹고, 통닭도 뜯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마트에 가면 잘 손질된 닭들이 냉장고에 빼곡하다. 깔끔하게 포장된 그 연분홍빛 살덩이들은 지나치게 정갈하고 반지르르해서 그저 상품으로 느껴지지 생명체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 윤기 나는 덩어리들도 모두 한때는 목이 마르면 물을 찾고, 천둥에 소스라치기도 했을 하나의 생물이었을 텐데. 피가 돌고 온기가 느껴지던 하나의 생명이었을 텐데. 냉장고 조명 아래 놓여 있으니 플라스틱 정도의 물성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정돈된 결과치만 본다는 것은 이런 문제점이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이 그저 말끔하고 매끈해서 그 이면의 고통, 희생, 죽음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백화점에 진열된 털재킷은 그저 보드랍고 포근해 보이지, 모피를 위해 살육된 동물의 처절함은 전해지지 않는다. 한우 전문점에서 마주한 붉은 고깃덩이들은 우리의 침만 고이게 할 뿐 애통함을 자극하진 않는다. 곳곳의 비명과 공포, 피가 흥건하고 털이 휘날리는 중간과정은 컨베이어벨트 어딘가에서 썰려나갔을 것이다. 우리는 잘 포장된 결과치만 받아들면 그뿐이니까.

근래 친한 친구가 대파를 키우기 시작했다. 대파가 흙에 대충 꽂아만 놔도 쑥쑥 큰다는 이야기를 듣고 재미삼아 두어 뿌리 심어봤다고 했다. 그런데 대파는 정말 무섭도록 잘 자랐다. 나에게 이따금 사진을 보내줬는데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정성을 기울여 키우는 화초도 아닌데 과분하리만치 전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친구는 끄트머리 부분을 썩둑썩둑 잘라 요리에 활용하기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대파는 아랑곳없이 계속 자라줬다고 한다. 그토록 신실하게 자라봐야 볶음밥에 사용되거나 제육볶음에 들어갈 뿐인데도 말이다. 우리는 대파의 무한한 생명력과 강인한 의지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대파는 어느 날 꽃봉오리를 맺고야 말았다. 나는 대파에도 꽃이 핀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주변에 물어보니 대파는 꽃을 피우면 맛이 없어진다고 했다. 영양소가 전부 꽃으로 간다는 말에 친구는 꽃망울을 모두 잘라버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딱해 딱 한 송이만 남겨뒀다고 한다. 나는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부엌 한구석의 손바닥만 한 화분에서 살며 자라는 족족 썰려나가 요리가 되는 주제에 온 힘을 끌어 모아 꽃을 품어냈다는 것, 식료품의 삶을 사는 와중에도 이다음 생을 도모한 것이 짠했기 때문이다.

중간 과정을 본다는 것은 이런 의미인 것 같다. 내가 만약 마트에서 손질된 대파 세트를 샀다면 이런 종류의 감정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형광등 불빛 아래 매끈한 몸체를 드러내고 같은 길이로 썰려 랩에 싸여 있는 대파들을 보았다면 무심하게 장바구니에 담았을 것이다. 이것이 한때 살아 있던 무엇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모든 상품의 결과 값만 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잘 포장된 닭가슴살을 보면서도 태어나 처음 외출을 하고 호기심에 사방을 살피던 닭의 눈동자를 떠올리려고 애쓰고, 랩에 싸인 파들을 보면서도 친구네 집 한편에 딱 한 송이 피워낸 파꽃을 떠올리려 애쓴다. 눈앞에 없는 것을 상상하려 노력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생명이 상품으로 보이고, 모든 실체가 모형으로 보이고, 모든 물성이 가상으로 여겨질 것이다. 나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홍인혜(시인·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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