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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박상익] 번역 현실에 분노해야



지난해 1월 청와대 국민소통광장에 ‘번역청을 설립하라’는 청원을 올렸다. 같은 시기에 ‘번역청을 설립하라’는 책도 출간했다. 꼭 번역청이 아니더라도 번역위원회 등을 설치해 정부 차원의 대대적인 번역 지원이 필요함을 호소하는 청원이었다. 현행 한국연구재단의 명저번역지원 사업 관행을 따른다면 관련 공무원은 실무자 2, 3명이면 충분하다.

번역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생 시절 번역서를 읽으면서였다. 어학과 전공 공부를 병행하기 위해 원서와 번역서를 대조해가면서 읽었다. 널리 이름이 알려진 교수, 학자들의 번역서를 읽으면서 말도 안 되는 엉터리 번역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일개 대학생이 더듬더듬 사전을 찾아가며 읽는 중에도 숱한 오역과 비문(非文)들이 보였다. 명사들의 마각(馬脚)을 본 셈이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책을 가까이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고, 번역에 대한 유사한 문제의식이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국민청원의 답변을 얻기 위해서는 20만명의 서명을 얻어야 했지만 결과는 초라했다. 서명 숫자는 9417명이었다. 실패였다. 하지만 일부 언론에서 청원에 관심을 보였고, 그것이 반향을 일으켜 한국연구재단의 번역 지원 예산이 기존 연 9억원에서 18억원으로 배 늘어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언 발에 오줌 누기’ 수준의 이런 조치는, 물론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근본 대책이 될 수는 없다.

번역에 대한 무관심은 한국사회의 독서 수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국민 절대다수가 번역 안 된 책, 제대로 번역되지 않은 책으로 인한 불편함을 경험한 적이 없는 것이다. 분노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번역을 시장에만 맡길 수도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독서율 최하위 수준인 한국의 출판시장은 꽁꽁 얼어붙은 빙하기다. 번역에 뜻을 둔 우수 인력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인공지능의 눈부신 발달로 더 이상 사람이 번역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파스칼, 헤겔, 칸트, 토마스 아퀴나스, 노자, 장자, 공자, 사마천 등의 고전 번역은 번역이 아니라 해독, 판독, 연구라고 해야 맞다. 인공지능으로 고전 번역도 가능할까. 이게 가능하다면 연구와 창작도 인공지능이 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한 독자는 ‘번역청을 설립하라’를 읽고 이국종 교수의 권역외상센터 설립 주장을 떠올렸다며 이렇게 말한다. “열정적으로 번역을 다룬 이 책을 덮고 나니, 외상치료체계의 내실화를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는 이 교수가 떠오른다. 본인이 생각하는 점을 외롭게 외치고 있다는 점이 겹쳐서다.” 공감해준 독자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번역청 설립과 권역외상센터 설립은 대중적 설득력이 그야말로 천양지차다. 이 교수의 주장은 초등학생도 공감 가능한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번역 문제는 다르다. 대졸자라도 책과 거리가 멀다면 공감하기 어렵다. 번역의 문제점에 분노하면서, 열악한 번역 여건에 절망해본 독자라야 공감할 수 있다. 인공지능 만능을 떠벌리는 무책임한 장밋빛 낙관주의에 휘둘리지 않는 냉정함과 균형 감각이 있어야 한다. 이런 독자가 몇이나 될까. 사정이 이러니 ‘다수 여론’을 지렛대 삼아 정부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2008년 고려대에서 열린 제18차 세계언어학자대회는 인간이 ‘모국어를 사용할 때 가장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나라와 민족의 앞일을 생각한다면 부끄럽고 초라한 모국어 콘텐츠를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 결국 번역청(또는 번역위원회) 설립은 통찰력과 국가 비전을 지닌 소수의 정책결정자들이 결단해 톱다운 방식으로 실행하지 않으면 성사되기 어렵다. 우리 가운데 민족 이상과 미래 전략에 눈뜬 지도자가 있으리라고 믿고 싶다. 5년짜리 정권에 백년대계를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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