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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칼럼] 본질은 결국 북한체제 문제다



비핵화 시늉으로 경제 지원을 받고 협력과 개방도 체제를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 국한한다는 것이 북한의 계산
진정한 비핵화와 체제 변화를 위한 통 큰 결단 내리도록 만들어야 ‘신한반도 구상’도 빛을 볼 수 있어


바둑 공부의 제왕은 복기다. 복기 없이는 바둑 고수가 될 수 없다. 중국의 천중이 쓴 ‘복기의 힘’에 따르면 복기는 회고, 반성, 탐구, 향상의 네 단계를 거친다. 회고는 목표와 과정을 돌아보는 것이다. 반성으로 원인을 찾고 탐구로 승패를 가른 규칙을 찾는다. 향상은 실력을 끌어올려 다음 승부에 임하는 것이다. 2차 북·미 정상회담 실패도 제대로 복기해야 또 희망 고문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회고: 산이 있는 바다 풍경에서 미국은 산을 바라보는데 북한은 바다를 바라본다. 목표가 다른 것이다. 미국의 목표는 북핵 제거인데 북한의 목표는 핵무기를 이용해 체제를 유지하고 돈을 버는 것이다. 동상이몽이다. 북한의 비핵화가 미국의 비핵화와 다르지 않다고 보장해준 것은 한국이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믿을 수 없다는 미국 내 다수 의견의 손을 들어줬다. 북한이 70년 동안 체제를 유지하면서 ‘신의 경지’에 이른 협상 기술이 유인 판매(bait and switch)다. 값싼 상품으로 소비자를 끌어들인 뒤 비싼 상품을 파는 상술이 유인 판매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대가 유인 판매로 고가 부동산을 팔았던 트럼프였다. 그는 지갑에서 신용카드까지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으면서 한 마디 뱉는다. ‘나 안 속아!’ 허를 찔린 북한은 판매 전략을 다시 짜야 할 판이다. 물론 미국과 한국도 마찬가지다.

반성: 원인을 제대로 찾아야 한다. 회담 결렬이 트럼프의 변심 때문인가. 협상 팀의 실력이 없어서인가. 북측이 너무 세게 금을 불렀나. 이런 이유들은 다 표피적이다. 본질은 결국 체제 문제다. 개발이 체제 유지의 수단인 한, 체제에 변화를 줄 의사가 없다면 핵무기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북을 뼛속 깊이 아는 태영호 전 공사도 이를 확인해준다. 현재까지 나타난 바로 북한은 큰 체제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비핵화 시늉으로 경제 지원을 받고, 협력과 개방도 체제를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 국한한다는 것이 북한의 계산이다. 관광특구로 외화벌이하고 일부 경제특구에 외국 자본을 끌어들인다는 구상이나 이는 중국이나 베트남의 길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사유재산도 인정하지 않고, 기업의 자유 활동도 보장 안 하면서 개혁·개방이 어떻게 가능한가. 중국, 베트남이 성공한 것은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체제에 대한 불안 때문에 북한은 그러지 못한다. 한국과 주변국의 지원만 바랄 뿐이다. 지루한 핵 협상을 지렛대 삼아 살라미 전술을 펴야 하니 이 역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요컨대 체제 문제가 본질이다. 북한이 적어도 베트남, 중국 수준의 변화를 선택하지 않는 한 비핵화도 어렵다고 봐야 한다.

탐구: 나라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협상에서 확인된 규칙이 있다. 첫째, 분위기에 쓸리지 마라. 대화를 이끌어내고 평화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박수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 분위기를 성과로 이끄는 것은 역시 ‘냉철한 전략’이다. 둘째, 희망적 사고로 상대의 말만 믿지 말고 행동을 통해서 의도를 확인하라. 현 정부는 북한이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되뇌지만 행동으로는 ‘아직’이다. 셋째, 정치적 이용 금지 규칙이다. 트럼프도 결국 이 사안을 자신의 정치적 이익과 분리하지 못해 불신을 자초했다. 이 정부가 평화를 앞세워 보수 전체를 반평화, 심지어 친일 세력으로 매도하려는 것도 유치한 프레임이다. 관점과 방법의 차이이지 북한이 핵무기를 제대로 없애면서 남북 협력을 하자는 데 누가 반대하겠는가. 무기소지 검사도 안 하고 파티만 열겠다고 하니 비판을 받을 뿐이다.

향상: 다시 이제부터다. 협상이 깨졌으나 더 잘될 것이라고 희망 사고를 반복해야 소용없다. 현실을 직시하자. 미국은 ‘기본으로 돌아가자!(Back to Basic)’는 분위기가 한층 강화될 것이다. 존 볼턴이 공개한 빅딜 제안의 내용은 단순 명쾌하다. 북핵 제거가 기본이란 말이다. 살라미가 더 이상 안 통한다는 선언이다. 비핵화 목표와 신고, 사찰, 검증 스케줄에 합의하지 않고 미끼상품 교환 방식으로는 협상의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비핵화에 샛길은 없다. 북한이 체제 변화 없이 핵무기만 들고 살 방법도 없다. 다시 도발로 돌아가면 그것은 죽음을 재촉할 뿐이다.

하노이에서 평양까지 긴 여행은 김정은 위원장에게 중요한 성찰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베트남의 변화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과감한 개혁·개방, 미국과의 적대 해소로 번영의 길에 들어선 베트남 아닌가. 용단을 내려야 한다. 핵무기 들고 찔끔 개방하는 전략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문재인정부의 올바른 중재도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본질을 외면한 북한 도우미 역할은 더 이상 어렵다. 비핵화 열차가 섰는데 경제협력 열차가 출발할 수는 없다. 북한이 진정한 비핵화와 체제 변화를 위한 통 큰 결단을 내리도록 만들어야 ‘신한반도 구상’도 빛을 볼 수 있다.

박형준(동아대 교수·전 국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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