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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지호일] 누가 고향에 침을 뱉는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이후 ‘고향의 봄’ 노래를 듣노라면 불현듯 콧마루가 시큰해지고 따뜻한 그리움 같은 것이 일곤 한다. 고향이 주는 정한(情恨)이 있다. 그래서 남북 정상이 만난 자리에서도, 이산가족 상봉장에서도 고향의 봄을 부르며 고향을 공유한다. 태어나 자란 곳은 달라도 고향에서 얻는 위로는 다르지 않은 것이다.

고향에 대한 정서가 보편적이라면, 고향의 공간적 기초인 지역은 개별성을 띤다. 산과 내, 토양이 만들어낸 저마다의 특색이 있다. 이 지역적 차이의 틈새로 정치·경제적 불평등이나 인사차별, 이념적 프레임 등 갈등 요소들이 끼어들면 지역주의라는 돌연변이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지역감정, 지역갈등, 지역차별 따위의 부정적 의미를 통칭하는.

그러므로 이 지역과 저 지역 사이에 배타적 거리감이 존재한다 해도 그것은 복숭아꽃이나 살구꽃, 아기 진달래의 잘못은 아니다.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냄새를 풀풀 풍기는 것이 지역주의다.

지난 수십년간 지역주의만큼 많은 논란을 부른 용어도 드물다. 역사적 기원에 대한 진단부터 엇갈린다. 어떤 이들은 통일신라 또는 그 이전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흔적을 찾는다. 통일신라의 백제 유민 차별 정책, 고려의 후백제 출신 등용 배제, 조선 후기 붕당과 사화(史禍) 등에서 지역갈등의 단초가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역주의를 ‘역사의 앙금’으로 보는 식의 해석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한 비약과 구멍이 있다. 한국사 전개 과정에서 지배층의 정치적 목적이나 권력 내부 다툼에 따른 지역 간 대립이 나타날 때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고 지엽적인 현상이었다. 이병휴 경북대 교수는 논문 ‘지역갈등의 역사’에서 “한 지역이 소외됐다 하더라도 지배층의 이해관계였을 뿐 기층민간의 불협화음으로까지 확산되지는 않았다”고 지적했다.

따지고 보면 농업 사회에서 대다수 백성들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출생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았는데, 다른 지방을 굳이 의식하거나 적대할 이유는 없었을 것 같다.

여러 학자들은 지역주의를 근대화의 산물로 인식한다. 그것도 박정희 권위주의 정부 때인 1960~70년대를 주목한다. 당시 급속한 산업화·도시화로 농촌 인구가 대거 서울로 이동했는데, 이들은 주로 도시의 하층부로 편입됐다. 그중에서도 호남 출신이 다른 지방보다 월등히 많았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서의 경쟁은 이주민들 사이에서 다수파인 호남에 대한 편견과 부정적 이미지를 퍼뜨렸을 수 있다.

박정희정부는 이런 반(反)호남 정서를 조직화해 정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지역주의가 선거 소재로 호출된 것이다. 여기에 반공 이데올로기도 얹혀졌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책 ‘만들어진 현실’에서 “한국 지역주의 문제의 핵심은 반호남주의”라고 단언했다.

이것의 극적 표출이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 그 7개월 전의 부마항쟁 때와 달리 광주항쟁에는 즉각 ‘빨갱이’ 딱지가 붙었다.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 인물 및 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5월 21일 계엄사령부 담화문).

지역주의는 굴러가기 시작하자 지속성을 발휘했다. 많은 정치인들이 수혈을 받으려 지역주의를 자극하거나 이에 올라탔다. 지역주의는 꺼진 듯하다가 다시 불붙기를 반복하더니 기어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죽은 건 “지역주의 소멸”을 자신했던 정치적 구호였다.

최근의 5·18 폄훼 논란도 이 연장선 위에 있다. 이미 수차례 국가기관의 공식 조사와 사과를 통해 민주화운동으로 판정 났음에도 이를 부인하는 쪽은 도무지 확증편향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더욱이 인터넷 게시물과 소셜미디어 같은 사이버 세상은 지역주의를 유통시키는 수준을 넘어 재생산하고 증폭시킨다. 지금 5·18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라. 이 밑도 끝도 없는 혐오, 적개심은 무엇인가. 선거 등 특정 시기 때 표출되던 지역주의가 일상화, 보편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울 정도다. 이대로라면 해결의 실마리는 한두 세대가 더 지나도 찾을 수 없을 듯하다.

익명성의 뒤에 숨어 ‘전라도 좌빨’ 댓글을 달고 흡족해 하는 이들은 혹시나 자신이 주입된 편견, 조작된 인식에 감염돼 있다는 의심은 해봤을까. 당신이 가차 없이 침을 뱉는 지역들은 우리 동료와 이웃의 고향이기도 한 것을.

blue5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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