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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박재찬] 네고의 세계



‘인생의 80%가 협상이다’라는 말이 있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하루하루가 협상의 연속이다. 시장에서 물건 값을 흥정할 때도, 저녁 메뉴를 고르거나 자녀에게 용돈을 쥐어주는 일에도 협상이 필요할 때가 있다.

일상에서는 협상이라는 말 대신 ‘딜(deal)하다’ ‘네고하다’가 자주 쓰인다. 협상을 뜻하는 영어 단어 네고시에이션(negotiation)은 부정(not)을 뜻하는 접두사(neg)와 여가(leisure)를 의미하는 어근(otium)이 합쳐진 단어다. 협상은 쉬는 게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일(또는 업무, 사업)을 하는 것이란 뜻이 담겨 있다.

비즈니스 세계는 협상이 곧 일의 전부다. 임금이나 가격뿐만 아니라 품질·납기를 정하는 것도 대부분 협상으로 이뤄진다. 협상이 그만큼 중요하다 보니 ‘협상의 기술’ ‘협상의 법칙’ 같은 실용 서적도 차고 넘친다. 이 책들에서 제시하는 협상의 기본원칙은 얼추 비슷하다. ‘목표를 설정하라, 상대방 정보를 최대한 확보하라, 시간에 휘둘리지 마라, 배트나(BATNA, Best Alternative To Negotiated Agreement)를 준비하라’ 등이다. 배트나는 협상이 깨졌을 때 선택 가능한 최선책을 말한다.

협상을 얘기할 때면 유대인의 협상술을 최고로 꼽기도 한다. 협상은 지혜를 중시하던 유대인들이 오랜 세월 떠돌면서 터득한 생존 수단이기도 하다. 유대인 출신의 세계적 부호들의 저력도 협상력을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유대인 부모들은 자녀를 어릴 때부터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가령 용돈을 줄 때도 지급일과 액수, 가불 등에 대한 규칙을 미리 정해 놓고 약속한 사항이 바뀔 때면 협상을 활용한다. 자녀가 용돈이 더 필요하다고 해서 무조건 떼를 써서 얻어내게 만들지 않는다. 왜 용돈이 필요한지, 어디에 얼마만큼 쓸 건지 등을 부모에게 설득하면서 협상 기술을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만든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는 효율적인 협상을 위한 3가지 요소로 ‘열린 대화’ ‘타협 의지’에 앞서 ‘신뢰’를 가장 먼저 꼽았다. HBR은 거래를 성사시킬 만한 합의점을 찾기 원한다면 무엇보다 협상 당사자가 시간을 두고 신뢰를 쌓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시간이 없다면 ‘당신을 믿는다’ ‘나를 믿어도 된다’는 믿음의 신호라도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당신은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신뢰가 성공적인 협상을 이끄는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을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 다양한 분석이 쏟아지고 있다. 북한의 ‘살라미 전술’이 실패했다는 지적부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특유의 ‘벼랑 끝 전술’ 카드가 또 나온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비즈니스맨 출신이자 협상의 대가로 불리는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협상 실패를 두고 “언제든지 (협상장에서) 걸어 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협상 스타일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 ‘거래의 기술’에는 협상의 법칙 가운데 하나로 ‘항상 최악의 경우를 예상하라’는 지침이 포함돼 있다.

북·미 정상회담을 지켜보면서 ‘둘 다 불신의 골이 꽤 깊구나’ 하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북한이 제재 완화를 밀어붙이고 미국이 ‘+α’ 카드를 꺼내 든 건 서로 믿지 못하는 구석에 대한 의구심이 얼마나 짙은지 보여주는 것 같다. HBR의 협상 법칙에 따르면 양쪽 다 타협 의지가 분명하고, 열린 대화 방식도 택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신뢰의 점수는 양쪽 다 충분히 쌓아 놓지 못한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 판이 깨진 뒤 카운터파트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대해 언급하면서 ‘호감’ ‘좋은 관계’ ‘친구’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신뢰’ ‘믿음’ 같은 단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둘 사이의 중재자로 또다시 떠오른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목이 쏠리고 있다. 어깨가 무거울 것 같다. 다른 것보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 사이에 신뢰의 가교를 놔주는 일이 급선무 아닐까.

박재찬 경제부 차장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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