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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한승태] 내 안의 다른 나



영화 ‘어벤져스’에서 내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대목은 영화 후반의 아주 사소한 장면이다. 녹색 태풍이 되어 주위를 초토화시켰던 헐크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온 브루스 배너는 자신이 박살 낸 건물의 잔해 위에 서 있다. 그때 인기척을 듣고 누군가가 다가온다. 브루스 배너가 겁에 질린 남자에게 묻는다. “누구 다친 사람은 없나요?” 자신이 만든 폐허를 둘러보는 브루스의 얼굴엔 설명하기 힘든 죄책감과 참담함이 담겨 있다. 이 영화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이 장면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어째서일까.

가끔씩 괴물로 변한 나 자신과 맞닥뜨리게 된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지, 내가 어쩌자고 그렇게 행동했지, 하는 고민에 빠져들게 만드는 순간을. 평소의 내가 욕하고 손가락질했던 바로 그 행동을 태연하게 저지르고 있는 나 자신을. 내가 그런 순간들을 다시 생각해보기 시작한 건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옛날 일기를 정리하다 미묘한 공통점을 발견했다. 내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고 주먹을 휘두르는 대목에선 언제나 1인칭 시점의 글인데도 3인칭처럼 묘사해 놓았다. 다시 읽어보니 자주 반복하는 문구들이 눈에 띄었다. ‘나도 모르게’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언가 나를 사로잡았다’ 등등 이런 서술 방식의 효과는 분명했다. 내가 난동을 부리는 장면에선 내가 아닌 주어를 배정받지 않은 어떤 투명인간이 고함을 지르며 날뛰고 있었다. 읽는 사람들에게 이런 짓을 저지른 사람은 내가 아니라 어떤 불가항력적인 존재라는 인상을 심기 위해 애쓰는 글이었다.

그래서 역사상 가장 유명한 분노조절장애 환자 2명을 (이 경우엔 쌍이라고 해야 할까?) 떠올리게 된다. 헐크와 브루스 배너 그리고 지킬 박사와 하이드. 브루스 배너와 지킬 박사의 차이점은 자기 인식의 연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브루스는 자신이 헐크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그는 헐크가 저지른 폭력이 곧 자신의 폭력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반면에 지킬은 끊임없이 하이드로 변신한 동안의 자신을 부정한다. 그는 하이드가 휘두른 폭력을 자신이 한 짓이라고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지킬 박사는 말한다. “나는 지금 ‘그’라고 부르고 있다. 도저히 ‘나’라고 할 수가 없다.” 나는 의심의 여지없는 지킬 박사였다. 다른 사람과 동물에게 깊은 상처와 고통을 가하는 행동을 했을 때 나는 언제나 그것이 내가 아는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무언가가 나를 사로잡아 나도 모르게 저질러 버린 일이었다고 항변하곤 했다.

그렇게 내가 인정하는 나와 부정하고 싶은 나를 분리해 각각 다른 존재로서 생각하니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여전히 점잖고 예의 바른 선량한 시민이었고 내가 저지른 잘못들은 악몽처럼 불쑥불쑥 나타났다 사라져 버리는 불쾌한 경험일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한다면 비열하고 잔인한 나 역시 나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것들 모두 내 의지와 선택의 결과인 이상 어떤 것은 나고 어떤 것은 내가 아니었다고 할 수는 없다. 아무리 후자의 나 앞에 ‘평소의’ 같은 단서들을 붙인다 하더라도 말이다.

내 안에 분명 그런 기질이 있다. 화가 나면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주먹을 휘두르고 싶어 하는 그런 기질이. 내가 상대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을 때 더욱 거칠어지는 그런 기질이.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것들이 내 일부인 이상 나는 그런 점들을 고치기 위해 무엇이든 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나와는 별개의 존재여서 신 내림 받듯 외부에서 덮쳐오는 것이라면 내가 후회할 것도, 반성할 것도, 다짐할 것도 없다. 그것들은 인격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도망가 버렸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들이 다시 나왔을 때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는 것밖에는 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어째서 문제의 영화 장면이 내게 그토록 강한 인상을 남겼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 때문에 엉망이 된 건물을 바라보며 다친 사람은 없느냐고 묻는 브루스 배너의 얼굴에는 악당과 맞서 싸우는 용기만큼이나 중요한 용기, 즉 악당보다 더 악당 같은 내 모습 역시 나라고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한승태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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