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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김현길] 두들겨 패서 얻은 메달



신치용 신임 국가대표 선수촌장의 사위 박철우 선수는 체육계 폭행 피해자로 언론 앞에 선 적이 있다. 그는 2009년 9월 18일 저녁 아버지와 함께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붉게 상처 입은 자신의 얼굴과 배를 공개했다. 아시아남자배구선수권을 앞두고 태릉선수촌에서 합숙훈련 중이던 그는 전날 이상렬 코치에게 맞은 후 선수촌을 이탈해 전치 3주의 진단서를 들고 폭행 사실을 알렸다.

박 선수의 기자회견 이후 당시 박용성 대한체육회장은 “선수들의 성지인 태릉선수촌에서 폭력행위가 발생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며 진노했다. 대한체육회는 극히 이례적으로 선수촌장 명의로 가해자를 경찰에 고발했다. 박 전 회장은 그해 국정감사에서 “두들겨 패서 얻는 메달은 필요 없다”며 “선수 폭력과 성폭력은 반드시 추방시키겠다는 것을 약속드린다”고 강조했다.

조재범 전 코치의 심석희 선수 폭행은 박 전 회장의 약속이 있은 지 9년이 지나 세상에 드러났다. 장소만 태릉에서 진천으로 바뀌었지 양상은 비슷했다. 대회를 앞두고 ‘선수들의 성지’라는 선수촌에서 폭행이 일어나 선수가 이탈했다는 점에서 같았다. 더욱이 조 전 코치는 선수촌 등에서 성폭행을 저지른 혐의로 검찰 수사도 받고 있다. 수면 위로 드러난 사건의 심각성만 놓고 보면 개선은커녕 오히려 뒷걸음질 쳤다는 비판을 면키 힘들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폭행에 시달렸다는 심 선수의 말을 감안하면 박 전 회장의 약속과 무관하게 폭행은 지속됐다. 선수촌이 선수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점도 바뀌지 않았다. 가해 코치를 포함한 코치진, 해당 연맹, 선수촌을 관리하는 체육회가 책임의 주체다. 선수가 코치진, 해당 연맹, 선수촌 중 한 곳이라도 신뢰했다면 선수촌을 뛰쳐나가는 선택을 했을까. 실제 문화체육관광부 감사에서 심 선수의 나머지 코치들이 폭행 사실을 허위 보고해 폭행을 은폐하려 한 사실이 확인됐다. 심 선수 이탈 다음 날 문재인 대통령의 격려 방문 때 “심 선수가 감기로 병원에 갔다”고 연맹과 체육회에 보고한 것이다.

9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국가대표의 ‘선수촌 이탈’이라는 사건이 되풀이된 것은 이 문제가 그만큼 뿌리 깊고 복잡하다는 걸 방증한다. 체육계는 관련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처벌 강화와 제도 개선을 약속했다. 박 전 회장처럼 회장이 나서 가해자 처벌을 밀어붙인 적도 있다. 하지만 늘어난 용수철이 제자리를 찾아가듯 시간이 흐르면서 같은 문제가 반복됐다. 그간의 대책과 개인의 의지는 반대로 보다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힘이 가해질 필요가 있다는 점만 부각한 셈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할 상황이지만 현재 분위기를 보면 선뜻 기대를 걸기는 힘들다. 문체부는 지난달 8일 조 전 코치의 성폭행 혐의 보도가 나온 이튿날 오전 기다렸다는 듯이 가해자 처벌 강화, 합숙훈련 재검토 같은 향후 대책을 발표했다. 방향만 밝히고 추후 대책을 내겠다고 했지만 이후 쏟아진 대책도 충분한 숙의 후에 나온 것인지 의문이다.

체육계를 대표하는 체육회는 정부 쇄신안에 공개 반발하며 대립각을 세우는 데 몰두하고 있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체육계 개혁을 위해 출범한 스포츠혁신위원회가 첫 회의를 열던 날 소년체전 폐지,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분리, 합숙훈련 폐지 방침과 관련해 “애들 장난” “무지에서 나온 것” 같은 격한 표현을 쓰며 불편한 심경을 나타냈다. 체육계를 두고 “자정 기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비판까지 나오는 분위기를 제대로 감안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심 선수는 지난 12일 쇼트트랙 월드컵 5·6차 대회를 마치고 귀국했다. 결승에 오르진 못했지만 5차 대회 1500m 파이널B에선 포기하지 않고 레이스를 펼쳐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송경택 감독은 귀국 기자회견에서 “역경을 딛고 최선의 결과를 냈다”고 평가했다. 심 선수와 같은 피해자를 만들지 말아야 할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지금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혹여 ‘소나기는 피하자’는 심정으로 또다시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닌가.

김현길 스포츠레저부 차장 h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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