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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사라져선 안 되는 이야기



소설가 김영하가 방송에 나와 추천하면서 절판됐던 책이 되살아났다. 김은성 작가의 네 권짜리 만화책 ‘내 어머니 이야기’(애니북스)다. 이 책은 2008년 새만화책에서 처음 출간되고 2014년 완결 후 이내 절판됐다. 하지만 지난해 방송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김영하가 “세상엔 사라져선 안 되는 책들이 있다”며 이 책을 언급한 뒤 생명을 되찾았다.

책은 40대 작가가 10년간 대화를 통해 되살려낸 80대 어머니 이복동녀씨의 삶을 오롯이 담고 있다. 그녀와 가족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함경도 북청에서 출발해 6·25전쟁과 경제성장기, 민주화 시대를 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한다. 책장을 넘기는 동안 우리 세대는 잊고 있었던, 어쩌면 미처 알지 못했던 생생한 기록들 사이에서 이런 장면을 마주쳤다.

4권에서 어머니 이복동녀씨는 1993년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교회 나간 지 삼년 만에 집사, 집사 받은 지 오년 만에 권사를 받고 외할머니처럼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고 한다. 딸은 “엄마를 교회에 모셔다드리고 보게 되는 엄마의 쓸쓸한 뒷모습 때문”에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2014년 3월 초판 ‘작가의 말’에서 김 작가는 “어수선한 일이 우리 주변에 빼곡히 있지만 얄밉게도 엄마와 나는 평온하다. 엄마는 이게 다 하나님의 은혜라신다. 교회에 나가는 우리 둘만 우리 가족 중 가장 편한 생활을 하는 거라신다”고 적었다.

지난 설 연휴 기간, 취재차 서울 강남구 강남중앙침례교회에서 3대 목회자가 함께 드리는 예배를 드렸다. 1대 김충기 원로목사가 1976년 2월 허허벌판이던 강남의 한 건물에서 개척 예배를 드리며 시작한 교회는 한자리에서 43년의 세월을 지냈다. 2대 피영민 목사에 이어 최근 3대 최병락 목사를 맞았다. 예배 중 43년간 교회의 발자취를 기록한 짧은 동영상이 상영됐다. 흑백 사진으로 시작해 컬러 화면으로 넘어오면서 교회가 걸어온 길을 요약해 담고 있었다.

교회 예배당에는 혼자 거동하기 힘들어진 88세의 김 원로목사만큼 머리와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내려앉은 노인들이 적잖게 보였다. 누군가는 이 교회가 시작한 첫날부터, 누군가는 40년간 혹은 30년간 저마다 교회와 인연을 맺고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온 이들이었다. 예배를 마친 뒤 만난 성도들은 교회에 얽힌 사연을 수줍게 들려줬다. 잠에서 덜 깬 아이들을 깨워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 새벽기도를 하고, 부흥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뜨거운 체험을 하며, 성경공부를 통해 예수님을 알아가는 기쁨을 누렸던 이야기들.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야기야말로 한국교회의 역사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또 다른 역사가 아니었을까.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 곳곳에서 다양한 기념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당시 앞장섰던 목회자와 활동가, 그들이 몸담고 있던 기관이나 단체가 다시금 조명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동시에 그런 공식적인 기록만큼이나 사라져선 안 되는 이야기들이 곳곳에 숨어있으리라고 믿는다. 거창하고 눈에 띄는 큰일을 하진 않았더라도, 그 순간 그 자리를 지키며 충실하게 살아낸 사람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들 말이다.

한국사회는 근현대를 거쳐오는 동안 너무나 많은 것들을 기록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잃어버렸다. 그렇게 사라진 것이 많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것들도 있다. 100년을 세월을 지나 지금도 뿌리 내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들이 곳곳에 있다. 다들 먹고 살기에 바쁜 세상이지만, 교회마다 잊고 있는 이야기들을 찾아보면 어떨까. 교회건물을 세우고 목회자가 바뀌는 것만이 교회 역사가 아니다. 누군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누군가의 어머니와 아버지, 어떤 이의 딸과 아들이 남긴 많은 이야기 역시 교회의 역사이자 한국사회의 역사일 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2019년, 우리 교회에서 결코 사라져선 안 되는 이야기는 무얼까. 거창한 기념식이나 행사보다 그런 이야기들이 되살아났다는 소식을 나는 더 듣고 싶다.

김나래 종교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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